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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복 입은 일기

수필이 있는 뜨락(15)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Dec 11 2025 12:22 PM


누군가 묻는다. 일기와 수필의 차이점은 무엇이냐고. 누군가 대답한다. 일기는 나만 간직하고, 나만 읽을 수 있어 화장기 없는 민낯이거나 발가벗은 나체이어도 괜찮다. 하지만 수필은 남 앞에 서는 것이기에 나체의 일기에 수영복 정도 입혀 놓은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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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obe Stock

 

어머니 양수에서 맨몸으로 살다, 세상에 태어나 강보에 싸이고, 배냇저고리에서 수의까지, 우리는 사는 동안 수많은 옷을 입는다. 내가 살면서 입었던 옷 중 제일 불편했던 것이 정장 차림이었다. 양복은 항상 나에게 그에 맞는 격식 치레를 요구하고, 나는 격식 있는 장소에서 입은 정장을 그곳에서 나오자마자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양복 안에 숨은 넥타이처럼 매달린 인맥 고리들, 그 고리로 채워진 공간에서 훑어 내는 사람들의 시선에 숨이 막혔다. 나는 장소에 어울리게 옷을 입어야 했고, 입은 옷이 주는 불편함을 참아야 했고, 입은 옷처럼 행동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여름만 되면 양복 없는 해변으로 향했고, 그곳에는 자연을 닮은 자유로운 내가 있었다. 햇살이 펼쳐놓은 유혹의 도시 위로 수많은 옷 속에 갇혀 있던 내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밴쿠버의 여름은 짧고 강렬하다. 일 년 내내 비 오는 날이 많고, 구름 끼고 흐린 날씨 탓에 여름이 오면 햇볕에 홀린 듯 해변으로 향한다. 정해진 법칙처럼 해가 나면 해변을 찾는 것은 긴 우기를 견딘 나에게 보상처럼 주어진 한정판 햇볕의 짜릿한 매력 때문이다. 햇볕을 쏟아부은 해변에는 바람도, 사람들도, 부서지는 파도도, 하나 되어 흥분된 여름을 만난다. 나도 여름을 만나기 위해 들뜬 마음을 비치백에 넣고 해변으로 향한다. 

밴쿠버는 관광도시이다. 관광 명소라 불리는 곳 중 하나로 누드 비치가 있다. 렉비치라고 불리는 이곳은 대학교 부근에 있으며, 양쪽으로 해안을 감싸안은 숲이 병풍처럼 서 있고, 숲 사이로 움푹 들어간 비치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친 듯 고립되어 숨겨져 있다. 해안을 따라가다 보면 길에서 연결된 숲속으로 작은 길이 나 있고, 가파른 경사를 타고 내려가는 긴 계단이 해변과 이어진다. 계단을 따라 내려갈 때는 들뜬 마음에 몰랐지만, 돌아올 땐 급경사의 계단을 몇 번씩 쉬어가며 올라가야 했고, 해변에서 만난 모습들을 계단 위에 되돌려 놓고 돌아왔다. 

누드 비치의 입구에는 ‘옷은 옵션’이라고 팻말에 쓰여 있지만, 뜨거운 햇볕과 자연이 주는 유혹에 벗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백사장은 사람들이 남기고 간 비밀처럼 진한 회색이고, 탁 트인 바다가 하늘과 만나 입 다문 수평선을 만들고, 자연의 모습으로 햇볕을 받아내는 사람들이 모래 위에 누워있다. 누워있는 사람들 사이에 나도 있다. 앞모습이 적나라함이 부끄러워 엎드려 등만 햇볕에 내어준다. 따뜻함이 몸을 데우고 혈관을 타고 몸속 구석구석을 누빈다. 햇볕에 내어준 몸에서 독소처럼 묵은 상처가 빠져나가 해방감을 느낄 수 있어 자유롭다. 흙과 내가 부둥켜안을 수 있고, 맨몸으로 내 몸을 받쳐주는 흙이 미안하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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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obe Stock

 

멀리서 시끄러운 소리와 발자국이 밀려온다. 엎드린 채 고개를 들어보니 검은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흰 양말에 구두를 신고 무리를 지어 걸어오고 있다. 언뜻 보아 그들은 관광객으로, 시끄럽고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뱉어내며, 선글라스 밑에 감춰진 눈으로 해변을 훑고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서부 영화에 나오는 총잡이들이 무리 지어 말을 타고 모래바람 속으로 달려오는 장면처럼, 해변에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다가오는 그들의 발자국이 나를 덮칠 것 같아 나는 눈을 감는다. 뙤약볕 아래 걸쳐 입은 검은 양복이 그들의 치부를 온전히 가릴 수 없는지, 한여름에 흰 양말과 구두까지 챙겨 신고 해변을 샅샅이 구경한다. 찌푸린 내 눈길이 그들을 따라 움직이고, 햇빛이 들춰낸 그들의 속살이 양복 밑에서 꿈틀거린다.

엎드린 몸을 뒤집어 햇볕에 나를 온전히 내준다. 검은 양복을 향한 나의 반항이 몸속에서 튀어나오고, 뒤집어진 내 몸을 그들은 신기한 듯 흘기고 간다. 나는 누드 비치에 있다는 명분 하나로 온몸으로 검은 양복을 경멸할 수 있어 통쾌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의 언어가 오히려 다행이고, 맨몸으로 저항하는 내가 갑옷 입은 장수보다 용감하다.

무리가 지나가고 다시 조용해진 해변에 햇볕에 그을린 바람이 불고, 모래 위를 뒹구는 나와 자유가 있다. 순간마다 덧대어 입었던 옷들이, 수치심이, 바람과 함께 날아간다. 햇볕 앞에서 당당해지고자 벗어 던진 옷가지 수와 무게만큼 나는 오늘도 일기를 쓴다. 나의 삶이 누군가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지만, 가끔 나의 속살을 드러내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다면, 어느 날 진솔한 나와의 마주침이 그리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나의 수영복 입은 일기가 수필이란 이름으로 남 앞에 서도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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