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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황현수의 들은 풍월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Dec 23 2025 06:19 PM
연말이라 그런지, 창 밖의 빈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겨울 하늘을 보고 있으면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다. 그 호젓함을 채우듯, 흥얼거리는 노래가 있다. <낭만에 대하여>라는 노래인데, 앞부분은 잘 기억이 안 나고…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 만은/ 웬 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에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신기하게 이 구절만, 오래된 레코드판의 흉터에 바늘이 ‘툭, 툭’ 걸린 것처럼 자꾸 제자리를 맴돈다.

최백호가 부른 <낭만에 대하여>는 1995년 시청률 50%를 넘나들던 KBS에서 방영된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에 삽입되면서 히트를 치고, 그는 제2의 전성기를 맞는다. 한국일보 DB
최백호가 부른 이 노래는 1995년 처음 발표되었을 때, 그리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 1년 뒤, KBS에서 방영된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에 삽입되면서 운명이 바뀐다. 이 드라마는 당시 시청률이 50%를 넘나들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서울 변두리에서 목욕탕을 운영하는 할아버지(이순재 분)와 할머니(강부자 분)를 중심으로 그들의 자녀와 손주들이 대가족을 이뤄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그린 작품이다.
지금 보면 도저히 한자리에 모으기 힘든 역대 급 배우들이 총 출동했다. 장용, 고두심, 남성훈, 윤여정, 양희경, 송승환, 배종옥, 김상중, 도지원, 김희선 등이 출연하여 김수현 작가의 ‘캐스팅 화력’을 보여준 작품이기도 하다.
드라마 속, 둘째 사위(장용 분)는 다소 감구성이 풍부하고 고독을 즐기는 인물이다. 그가 퇴근길이나 집에서 쓸쓸할 때마다 <낭만에 대하여>를 흥얼거리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중년의 씁쓸함을 노래로 표현하는 모습에 “저 노래가 도대체 누구의 곡이냐?” 하는 궁금증이 늘어나게 된다. 이즈음, 눈치 빠른 라디오 음악 프로에서 이 노래를 틀기 시작했고 최백호는 ‘낭만 가객’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 노래는 최백호가 가사를 쓰고 작곡도 직접 했다. 노랫말도 좋지만, 한국적인 정서와 탱고풍의 이국적인 멜로디가 절묘하게 조화되어 처량하지 않게 은근히 가슴에 스며든다.
잃어버린 청춘을 ‘이제 와 새삼’ 따져 묻기보다, 그저 그 비어 있는 가슴 자체를 ‘낭만’으로 받아들인다는 가사도 대중에게 공감을 준다. 또한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라는 구절은 최백호의 실제 연인을 그리면서 쓴 가사여서인지, ‘누구나 한 번쯤 용기 내 꿈꿔보는 상상이지?’ 싶다. 나도 ‘첫사랑은 어디쯤 있을까?’ 하며 궁금해 보지만, 다 주책스럽고 궁상떠는 일이다.
최백호는 “고등학교 시절 미술학원에 다닐 때, 친구 여동생의 친구에게 첫눈에 반해 1년 정도 사귀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두 사람의 인연은 결실을 보지 못하고 이별로 마무리되었다. 그 후,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첫사랑이 부산 광안리에서 약국을 하며 잘 살고 있다” 라고 어느 언론에서 밝힌다.
최백호의 아버지는 제2대 국회의원(부산 영도구)으로 기대되던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그가 태어난 지 약 5개월 만인 1950년 6.25 전쟁 중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는 홀로 자녀들을 키웠다. 아버지의 얼굴조차 기억 못 하며 자란 최백호에게 어머니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부산 근처의 여러 지역을 옮겨 다녀야 했고, 대학 진학의 꿈도 포기해야 했다. 군 입대 후, 결핵을 진단받아 10개월 만에 의병 제대를 한다. 20대 중반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큰 상실감에 빠진다. 이후 부산의 음악 살롱을 전전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1977년에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로 데뷔한다.
이 곡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쓴 곡인데, 발표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 후, <영일만 친구야> 등이 히트하며 가요계 정상에 오른다.
최백호는 1980년에 당대 최고의 배우였던 김자옥을 만난다. 두 사람은 한 방송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하며 인연을 맺게 되었고, 짧은 연애 끝에 그해 결혼식을 올린다. 톱스타와 인기 가수의 만남은 큰 주목을 받지만, 3년 만에 합의 이혼을 한다. 성격 차이로 헤어진 두 사람의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결별 후에도 서로의 행복을 빌어 주는 등 좋은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984년에 새로운 인연을 만난다. 10살 연하의 콘트라베이스 전공자인 손소임과 재혼한다. 자연스레 방송 출연을 피하게 되며, 대중의 기억에서 멀어진다. 음악도 손에 안 잡히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불편해, 1989년 말에 ‘매를 본 꿩이 도망가듯’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로스앤젤레스(LA)에 도착한 그는 <한인 라디오 방송국>에서 진행자로 활동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가수인데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디제이를 해야 하는 상황에 깊은 회의감을 느낀다.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나” 라는 생각을 자주 했고, 이때의 고독과 결핍이 <낭만에 대하여>를 만드는 정서적 밑거름이 되었다고 회고한다.
1992년 말, 3년여의 미국 생활 끝에 ‘결국 나는 노래를 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빈손으로 돌아오지만, 그의 삶은 더욱 처절했다. 통장의 잔고는 항상 비어 있었고, 가리봉동의 작은 아파트에서 지내며 밤무대를 전전한다.
삶의 온도가 ‘겨울’을 벗어나지 못하자, "에라, 돈이나 벌어보자"는 마음으로 쓴 곡이 바로 <낭만에 대하여>였다. 고독과 빈곤이 버무려져 탄생한 곡이었으나, 처음에는 한 달 동안 음반이 20장도 안 팔릴 정도로 반응이 없었다. 그 뒤, 1996년에 <목욕탕집 남자들>을 통해 35만 장 이상이 팔리는 대박이 나면서 다시 국민 가수의 자리에 올라서게 된다.

KBS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1995년)은 이순재, 강부자, 장용, 고두심, 남성훈, 윤여정, 양희경, 송승환, 배종옥, 김상중, 도지원, 김희선 등이 출연하였다. KBS 제공
미국에서의 ‘결핍’이 없었다면 최백호의 ‘낭만’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낭만에 대해서>는 그의 음악 인생 중 가장 어두운 터널 끝에서 만난 한 줄기 빛이었지 싶다.
궂은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낸 마담에게/ 언제나 먼 곳에 여인처럼/ 다정하게 말을 걸어보렴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에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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