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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문화·스포츠

2026 신춘문예 수필 가작

윤경란 '폭싹 속아신게예, 고맙수다'


Updated -- Jan 07 2026 09:49 AM
  •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public@koreatimes.net)
  • Jan 07 2026 09:47 AM

한인문인협회 주최, 한국일보 후원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보기 시작했다. 제주 해녀들의 삼세대에 걸친 삶을 그린 작품이라기에 가볍게 틀었지만, 어느 순간 재생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해녀였던 외할머니 광례의 이야기, 뭍에서 고단하게 살아낸 엄마 애순의 세대가
지나고, 서울대로 진학한 딸 금명의 삶이 본격적으로 펼쳐질 때였다. 화면 속 장면들이 마치 내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느껴져 당황스러웠기 때문이다.

나의 외할머니는 제주 바다에서 물질로 생계를 이어가던 청상의 해녀였다. 거친 물살 속에서도 영민하게 삶을 일구며 어린 딸을 키웠다. 엄마가 물질을 배우고 싶어 했지만 외할머니는 단호히 막았다. 물질을 배워 시작한 삶은 평생 그 길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는 생을 품어주기도 했지만 한순간 모든 것을 앗아갈 수도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바다를 떠났다고 해서 편안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엄마는 결혼 후 남편의 잦은 사업 실패로 집안이 흔들릴 때마다 묵묵히 다시 일어섰다. 서울대에 다니던 나를 돕기 위해 홀로 상경해 고시촌 골목에서 떡볶이를 팔던 시절도 있었다. 하루
종일 서서 일하다 저녁이면 무릎이 퉁퉁 부어 돌아오곤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물질을 마치고 돌아오던 외할머니의 젖은 옷자락을 떠올렸다.

삶의 자리도, 형태도 달랐지만 두 여인이 감당해낸 하루의 무게는 묘하게 닮아 있었다.

드라마를 보다가 멈칫한 순간은 금명이가 자신의 속내를 엄마에게 쉽게 털어놓지 못하는 장면을 보았을 때였다. 나 역시 오랫동안 내 어려움과 마음의 결을 엄마에게 솔직히 밝히지 못했다. 집안의 유일한 기대를 짊어진 채 서울대에 진학했다는 사실은 나를 더 조용하게 압박했다. 외할머니와 엄마가 쌓아온 희생의 역사 위에 선 나의 삶이, 세대가 달라졌어도 크게 나아졌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언제나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고, 불안한 속내가 드러나는 순간이 두려웠다.

그러던 시기 IMF 이후 어려워진 한국의 삶을 정리하고 우리는 캐나다로 이민을 왔다.

낯선 언어와 문화 속에서 다시 공부하고, 다시 일하고, 다시 관계를 쌓아가야 했다. 25년 동안 가슴이 막히는 듯한 순간도 있었고, 다시 일어설 힘이 보이지 않던 날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바다에서 온몸으로 잠수하던 외할머니와 좁은 골목에서 하루를 버티던 엄마의 기억이 조용한 부력처럼 나를 떠받쳐주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외할머니의 바다도, 엄마의 골목도, 내가 지나온 이민자의 길도 결국은 각자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것을. 누구도 그 길을 피해갈 수 없지만, 그 길을 건너가게 하는 힘은 언제나 누군가를 지키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외할머니가 엄마를, 엄마가 나를 지켜냈듯 나 역시 내 아이들을 위해 내 삶을 버티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야, 나의 고단함은 더 이상 엄마에게 숨겨야 할 어두운 부분이 아니라 내가 걸어온 시간을 담아내는 자연스러운 흔적이라는 사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드라마는 결국, 내가 외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나 자신을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을 다시 돌아보게 했다. 지금 엄마는 나와 함께 캐나다의 단풍나무 아래에서 지내고 있다. 긴 잠수에서 올라온 외할머니가 내뱉던 숨비소리처럼, 긴 세월을 건너온 엄마가 비로소 숨을 고를 수 있는 자리다. 세대마다 선택한 길은 달랐지만 그 안에는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조금씩 내어놓았던 두 여인의 사랑이 면면히 이어져 있음을 안다.

그리고 나는 금명이처럼 이렇게 말하게 된다.

두 분, 그동안 정말 폭싹 속았수다.
고맙수다.

 

윤경란.jpg

윤경란

교학사 사전편찬실에서 미술사 담당. 1999년 이민. 현재 LDBI 건축 대표. 

 

당선 소감

이번 신춘문예 수필 부문 가작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쁘면서도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폭싹 속아신게예, 고맙수다'는 외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제 삶을 돌아보며 세대를 건너 이어진 여성들의 시간과 이민의 기억을 담아 쓴 글입니다. 사실 저는 동화를 쓰고 싶어서 글을 시작했지만, 처음으로 독자 앞에 선 작품은 수필이 되었습니다. 이번 당선은 제가 글을 계속 써도 되겠구나 하는 작은 확신을 건네준 계기가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삶의 자리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들을 차분히 써 나가고 싶습니다.

 

 

김영수.jpg

심사평(김영수)

2026년도 신춘문예 수필 부문에 접수된 응모 작품 중 27편이 심사 대상에 올랐습니다. 예년과 비슷한 수의 작품이 응모되어 수필을 쓰는 인구가 안정적으로 늘어가는 것 같아 반가웠습니다. 

가작으로 선정된 윤경란님의 ‘폭싹 속아신게예, 고맙수다’는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이미지로 외할머니에서 어머니로, 그리고 나에게로 이어지는 삶의 고단함을 극복해가는 과정을 담담히 서술합니다. 드라마와 현실의 삶을 교차하여 흡인력 있게 독자의 마음에 다가선다는 점이 설득력을 더합니다. 함축성 있는 표현으로 조금 더 깊이를 주었더라면 하는 점이 아쉬웠지만, 가족의 개인적 체험을 넘어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여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점이 돋보인 작품입니다. 마지막 “폭싹 속았수다. 고맙수다.”라는 제주 방언으로 마무리한 점이 훈훈한 인간성을 보여주며 울림을 남깁니다. 정진하시어 빛나는 작가로 거듭나시기를 응원합니다. 

 

 

 

www.koreatimes.net/문화·스포츠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public@koreatime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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