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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잔영
김정수(문인협회)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Jan 14 2026 05:19 PM
수필이 있는 뜨락(20)
며칠 전 꿈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았다. 아니 느꼈다는 표현이 적절하리라. 꿈속에서는 사람의 형체를 본다기보다 느낌으로 그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건 아닐까. 지나온 꿈을 더듬어 보건대 아버지가 등장하는 꿈은 내 마음 상태가 불안정할 때 주로 꾸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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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우리 삼 남매는 아버지를 무서워했다. 군인이었던 아버지가 퇴근하고 돌아오는 시간이 되면 늘 불안했다. 통근버스가 동네 어귀에 들어서면 바깥에서 신나게 놀던 아이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자기 아버지에게 뛰어가 반갑게 안겼었다. 반면 우리는 곧장 집으로 도망치듯 달려와 일렬로 서서 아버지가 집안에 들어서는 순간 '아버지, 다녀오셨습니까?'라고 외치며 군대식 경례를 붙여야 했다. 저녁 밥상머리에서는 그날 누군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어김없이 단체 기합을 받기도 하였다. 아침에는 아버지의 기상 구호에 맞춰 '총 기상, 총 침구 걷어.'를 복창하며 이부자리를 반듯이 개켜 놓아야 했다. 집에 손님이 방문하면 항시 꼿꼿한 부동자세로 서 있거나 꿇어앉아 있어야 했다. 그럴 적마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예절 바르다는 소리를 듣는 걸 자랑스럽게 여겼다. 스파르타식으로 자식을 훈련하는 것이 이상적인 교육이라고 믿는 아버지에게 온화함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하였다.
아버지는 자식들 성적에도 유난히 관심이 많았다. 중학교 1학년 첫 중간고사를 치고 났을 때, 아버지는 내 성적이 궁금하여 시험지를 미리 채점하였다. 나는 순간 혼나는 것이 두려워 틀린 문제 몇 개를 맞은 것처럼 해서 슬그머니 넘어갔다. 그즈음 내게는 지역 웅변대회에서 우승하여 학교를 빛낸 일이 생겼다. 담임 선생님이 칭찬해 주기 위해 상패를 들고, 나와 함께 토요일 오후 우리 집을 방문하였다. 그런데 그날이 하필 중간고사 성적표가 도착한 날이었을 줄이야. 아버지는 현관 마루에 올라서는 나를 보자마자 성적에 대해 거짓말했다는 이유로 내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나는 그대로 현관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놀란 선생님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아버지를 진정시키려 했다. 선생님 앞에서 너무 창피하여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거짓말했다는 것이 잘못인 줄 알았으나 그런 식으로 자존감이 무너지게 될 줄 예상하지 못했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한동안 나에게 인간적인 대접을 하지 않았다. 모멸감과 수치심은 나를 병들게 했다. 더는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최초로 들었다. 마침내 결단의 날을 맞았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방과 후 교실, 책상 사이 통로에 방석을 깔고 마지막을 맞이할 채비를 했다. 유서 따위는 치졸한 것 같아 쓰지 않았다. 준비한 나프탈렌을 수십 조각 내어 교실 주전자에 가득 담긴 물을 다 비우며 삼킨 뒤, 방석 위에 드러누웠다. 이제 죽으면 모든 고통과 번민은 사라질 테지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시간이 꽤 흐르고 어둑해질 때까지 신체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집에 돌아갈 일이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왔다. 다행히 아버지가 퇴근하기 전이었다. 나를 향한 아버지의 경멸은 기말고사에서 명예를 회복하고 나서야 그쳤다.
내가 아버지의 간섭과 통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어느 날 나는 아버지에 맞서 나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으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고 시위하였다. 고분고분하게 말 잘 듣던 딸자식에게서 일격을 당한 아버지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 덕분에 집에서 1시간 버스 통학 거리에 있는 학교 주변에서 하숙할 수 있게 되었다. 투쟁 끝에 얻은 자유를 처음으로 만끽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경제적인 독립을 이룰 때까지 아버지 굴레에서 완전하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식이 결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닌 인격체라는 걸 인식시키고,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었던 뜻깊은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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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환갑 전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석 달 전까지 3년 동안 아버지와 나는 연락을 끊고 지냈다. 결혼으로 인해 가족 누구도 화해시킬 수 없을 만큼 부녀 사이의 감정의 골이 깊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말기 위암으로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후에야 비로소 재회할 수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내 아들을 데리고 직장에서 휴가를 받아 부모님 집으로 내려갔다. 기차 플랫폼까지 마중 나온 아버지의 모습은 도무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였다. 아버지는 나를 보자마자 와락 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처음 보는 외손자는 안중에 없었다. 그것이 아버지 살아생전, 나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 만남에서 아버진 내게 미안하다고 사과했으나 내 마음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더 오래 사셨다면 나와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대답은 '아니요'였다. 아버지와 다르게 살기 위해 애썼다. 아버지처럼 자식에게 집착하는 일이 없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불쑥 자식을 소유물로 여기는 마음이 치솟을 때마다 아버지의 성격이 유전된 것이 아닌가 하여 괴로운 적이 많았다. 아버지는 왜 자식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리려 하지 않았을까를 떠올리는 일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더 이상 무의미하고 공허할 뿐이다. 오랫동안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 내가, 이제서야 아버지를 회상하며 안타까워할 수 있는 건 아마도 세월의 힘 덕분이리라. 불안정한 시절의 기운을 타고 마음이 복잡해진 요즈음, 아버지의 잔영이 내게 드리운 것은, 화해하지 못한 지난 세월이 상흔처럼 남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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