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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발(Silver thread among the gold)
황로사(문협회원)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Jan 22 2026 12:29 PM
수필이 있는 뜨락(21)
찬바람이 문틈으로 새어 들어온다. 날씨가 스산하고 마음까지 가라앉는 날이면 그리움을 품고 있는 노래를 듣는다. 손편지로 마음을 곡진하게 나누었던 친구만큼이나 속 깊은 곳을 만져주었던 홍하의 골짜기, 메기의 추억, 은발, 스와니강...등 미국민요를 좋아했는데 나는 특히 은발을 좋아했었다. 가사 내용보다 부드러운 물결처럼 애잔하게 흐르는 가락에 더 끌렸던 것 같다. 금빛 사이에 은색으로 물든 연인의 머리카락을 보며 회한과 격려를 그린 노래가 문득 떠오른 건, 그 분들과의 만남 때문 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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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지인 한 사람이 전화를 했다. 자신이 다니는 교회 시니어 칼리지에 있는 자서전 반을 맡아줄 수 없겠냐는 요청을 했다. 나는 자서전은 써 본적도 더구나 가르쳐 본 적도 없다는 이유를 대며 반사적으로 거절했다. 며칠 후 다시 전화를 걸어 문예반으로 이름을 바꾸겠다며 부탁을 할 때는, 무거운 부담을 안고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문학을 앞세워 누구를 가르칠만한 깜냥이 되지 못하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이왕 맡게 된 것이니 새로운 경험이 될 수도 있겠다며 나를 다독였다. 그러고는 생각을 바꿨다.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로 삶을 나누는 시간을 갖자고. 첫 시간이 다가오면서 긴장감이 얼마나 심했던지 한 시간 동안 말할 분량의 멘트를 연습하고 또 거듭하다 보니 나중엔 다 외우게 되었다.
글을 써올 것을 권유하고, 써온 것을 같이 읽고 합평하는 순서로 진행했다. 연필로 꾹꾹 눌러 써온 글들을 타이핑하고 인쇄해서 그 다음주에 나눠드린 후, 본인이 왜 이 글을 쓰게 되었는지 소개하고 읽게 했다. 길고 긴 세월을 살아오며 하고 싶었던 말과 하지 못했던 말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잘 보이려고 포장하는 것도 억지로 꾸민 것도 없이 연륜과 회한, 지성과 경험이 녹아있는 글에 마음을 실어 귀를 기울였다. 듣고 난 후에는 돌아가면서 느낀 점과 지적할 부분을 같이 나눴는데 처음에는 어색해서 서로 미루더니 점점 익숙해지면서 열정이 감돌기 시작했다. 뒤뜰에 있는 능금나무에 늦게까지 달려있는 쭈글쭈글한 열매에게 말을 걸다가 자신의 모습과 닮았음을 느끼고 글로 옮겨온 93세의 할아버지, 글은 못쓰겠다면서도 남의 글에는 면박을 주면서 날카롭게 지적하는 분, 한 주에 글하나 써오는 것이 쉽지 않건만, 서너 편씩 써오시는 분… 때로는 폭소를 터뜨리고 때로는 울컥하며 글을 나누는 가운데 어느덧 긴장감과 어색함은 서서히 친밀함 속으로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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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을 쓰기 위해 간직하고 있는 생각들을 가감없이 모두 알려드렸다. 동료나 선배들 앞에서는 괜히 잘난 척하는 것 같아 입을 다물어도 선생이라는 자리가 주는 장점이 있는 것 같았다. 듣기만 하면 좋겠는데 종이에 그것을 받아 적는 것을 볼 때는 가슴이 서늘해지기도 했다. 틀린 방법일 수도 있는데 문자로 남을 것을 생각하면.
크리스마스 즈음 문예반 학생들과 회동을 했다. 방학이라서 쉬는 기간에 점심을 대접한다는 그들의 배려였다. 식사를 하고 찻집으로 이동하려고 나오니 탄성이 나올 만큼 함박 눈이 그림같이 내리고 있었다. 이런 날엔 시 하나씩 쓰고 싶다는 건 모두에게서 동시에 팝콘같이 터져 나온 감성이었다. 백세시대가 말뿐이 아니라 눈앞에 펼쳐진 현실인데 습관적으로 '이 나이에'라는 말을 앞세워 감성을 누르고, 좋아하는 것을 놓아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자기가 선택한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도 흐믓함으로 채워준다. 어차피 시간은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흘러가지 않던가. 그들은 가을을 마무리하는 나의 삶을 격려하고, 나는 여유로워진 삶의 여백을 글쓰기로 선택한 그들을 응원했다.
어떤 음악이 한번 마음에 들어오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그 곡만 듣는 습관이 있다. 요즈음 은발(Silver thread among the gold)이 그렇다. 내면을 채워주는 음악은 삶에 위로가 되고 기댈 수 있는 역할을 해 주기도 한다. 이 곡에 애착을 갖는 건 이순을 넘긴 나 자신에게 '그동안 참 애쓰고 살았다'며 토닥이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젊은 날의 추억들 한갓 헛된 꿈이랴
윤기 흐르던 머리 이제 자취 없어라
오 내 사랑하는 님 내님 그대 사랑 변찮아
지난 날을 더듬어 은발 내게 남으리
후렴부에 반복되는 구절이 메아리가 되어 감정을 잔잔하게 적신다. 그분들의 환한 표정이 그 위에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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