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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가 지원한 ‘반공 대량학살’
빈센트 베빈스 '자카르타가 온다'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Jan 25 2026 12:49 PM
제3세계 독립국 이념 판단 나선 美 “반식민주의” 반둥회의도 反美 인식 반란군 지원 등 인니 내정에 개입 쿠데타 빌미, 최대 100만명 숙청 “한국 등 23개국서 대량학살” 분석
한강 작가는 대표작 ‘소년이 온다’의 제목에 대해,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 손에 목숨을 잃은 중학생 주인공이 시간을 건너 우리에게 다가오는 걸음걸이를 상상했다고 한다. 현재형 어미를 통해 과거의 죽음이 이 순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감각을 담아낸 것이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판차실라 사크티 기념물에 있는 7인 병사상. 이들은 1965년 10월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소행으로 알려진 쿠데타에 저항하다 사망한 인물로 기념되고 있다. 인도네시아 군부는 1965년 쿠데타 제압 후 전국에서 공산주의 지지자로 분류된 민간인 최소 50만 명을 살해했다. 자카르타=AP 연합뉴스
미국 기자로 워싱턴포스트 자카르타 특파원을 지낸 빈센트 베빈스의 ‘자카르타가 온다’는 2차 대전 이후 인도네시아가 냉전의 핵심 변수로 작용했던 역사를 다룬 책이다. 영어 원서 제목은 ‘자카르타 수법(method)’인데, 한국어 번역본은 한때 라틴아메리카에서 ‘반공 대량학살’을 예고하는 구호로 쓰였던 ‘자카르타가 온다’를 제목으로 했다.
반공을 앞세운 국제적 폭력의 시발점이 왜 하필 인도네시아 수도였을까. 역설적으로 이곳에서 벌어진 사건이 ‘너무나 완벽한 미국의 승리’로 진압돼 세계사에서 지워졌기 때문이다. 저자는 “1965년에 소련과 중국 다음으로 큰 공산당이 인도네시아에 있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다”고 일깨운다.
이야기의 시작은 미국이다. 그 자신도 정착민 식민지로 건설돼 치열한 독립 전쟁의 역사를 가진 미국은 전후 폐허가 된 유럽에서 공산당이 존재감을 드러내자 ‘각별한 관심을 요하는 국가’들을 사정권에 뒀다. 광신적 반공주의가 미국 정치 한복판에 자리 잡았고 세계는 얼어붙었다.

김종필(왼쪽) 전 중앙정보부장이 1962년 도쿄에서 수카르노 초대 인도네시아 대통령을 만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런 상황에서 1949년 독립운동 지도자가 공산주의자들을 무찌르고 세운 신생 인도네시아는 훌륭한 사례로 평가받았다. 미국은 ‘공산주의 봉기를 진압할 의지가 충분하며 미국에 장기적 이익을 가져다줄 것’으로 보이는 제3세계 중립국에 대한 관용 원칙을 ‘자카르타 공식(axiom)’으로 천명했다.
허니문은 길지 않았다. 1953년 집권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중립 정부도 잠재적 적으로 여기고 제3세계 독립국의 이념을 직접 판단하겠다고 나섰다. 2년 뒤 아시아·아프리카 26개국이 인도네시아에서 냉전 상황에서의 중립과 반식민주의를 외친 반둥회의도 ‘미국에 대한 반대’로 봤다.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비동맹노선을 고수하며 경제주권을 회복하겠다’는 인도네시아의 목표는 변함없었지만, 미 정부는 1958년 반란군을 뒤에서 지원하는 방식으로 내정에 깊이 개입했다.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면서 인도네시아는 소련 원조를 받게 됐고 민주주의도 후퇴하기 시작했다.
전선을 뒤흔든 일이 벌어진 건 1965년 9월 30일. 중간급 장교 몇 명이 우파 장군들을 납치·살해했다. 미국이 일찍이 ‘반공세력’으로 키운 군 지휘부에 의해 쿠데타가 12시간 만에 진압된 이후 6개월간 나라 전역에선 ‘피의 숙청’이 이어졌다. 희생자들이 한밤중에 ‘실종’된 것으로 꾸며진 탓에 50만~100만 명이 학살당했다고 추정될 뿐 정확한 피해 규모를 알기 어렵다. 미국은 이를 그간의 노력에 대한 성과로 여겼다. ‘자카르타 수법’은 이후 브라질, 칠레 등에서 재현돼 제노사이드를 초래했다.

자카르타가 온다·빈센트 베빈스 지음·두번째테제 발행·464쪽
여기까지 읽고 나면, 독자는 정작 인도네시아 대학살의 참상에 대해선 책이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베빈스는 책 말미에서 “생존자들에게 고문에 대해 묻는 질문엔 ‘억압의 정도만이 문제’라는 가정이 깔려 있다”며 의도적으로 쓰지 않았음을 분명히 한다.
대신 저자는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현지 단체 사무국 대표와 대화를 인용해 옹이가 된 비극을 보여준다. “(냉전에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해서 이겼죠.” “당신들이 우리를 죽였잖소.” 자카르타엔 외국인 출입을 불허하는 반공박물관이 운영 중이고, 처형장이었던 발리 해변엔 호텔이 들어섰다.
저자는 미국이 지원한 ‘반공 절멸 프로그램’의 영향으로 한국을 포함해 최소 23개국에서 대량학살이 벌어졌다고 분석한다. 다만 한국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데, 분단국가로서 공산주의를 ‘실존하는 위험’으로 겪고 있는 한반도 사례는 주제와 맞아떨어지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강 작가는 ‘소년이 온다’를 쓰면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고 밝혔다. 베빈스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12·3 불법 계엄을 언급하며 “세계 어느 곳에서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적었다. 성조기가 나부끼는 한국의 시위 행렬을 타고 자카르타는 어디까지 왔는가.
최다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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