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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귀소본능

박윤희(문인협회)


Updated -- Feb 05 2026 11:30 AM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Jan 28 2026 06:14 PM

수필이 있는 뜨락(22)


아흔두 권의 책을 팔았다. 며칠간 내리던 비가 멈춘 풍경이 정겹고 푸르렀던 날, 첫 구매자를 만났다. 마흔일곱 권의 책을 구입한 그녀를 만나는 순간, 부끄럽게도 눈물이 흐른다고 느낀 건 정겨웠던 푸르름 때문이었으리라. 그녀가 구입한 마흔일곱 권에 선물 세 권을 더한 박스는 꽤 무거웠다. 다정한 인상의 그녀는 나의 책 하나하나를 쓰다듬으며 고마워했다. 한 권 $3.00에 살 수 있었던 물리적인 가격보다 귀한 책을 내놓은 내 결단에 더 고마웠으리라 짐작한다. 책을 받아 들고 차에 타려던 그녀가 문득 뒤돌아 내게 말했다.

“귀한 책 다 읽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눌게요.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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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obe Stock

 

여전히 잠이 오지 않던 깊은 밤, 문득 사랑은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떠나보냄이라는 생각이 오래 머물렀다. 잠옷을 입은 채 더 이상 소유하지 않을 책을 선정하느라 내 작은 서재에서 희붐한 아침을 맞았다. 책갈피 사이사이 너무 많은 메모가 쓰여 있는 것, 그리고 더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책 몇 권을 빼고 나니 200여권이었다. 가지런히 책이 꽂힌 책장을 부분부분 나누어 사진 찍어 캐나다 한국인 스토리 모임 캐스모의 ‘사고팔고 아나바나’에 게시했다. 게시한 순간부터 띵똥띵똥 메시지 알림이 연달아 울렸다. 제목을 적어 올려 책을 구입할 의사를 밝힌 구매자가 9명. 구입 의사가 겹친 책이 여러 권이었다. 그들도 나도 안타까웠으나 메시지를 보낸 순서대로 구매자를 정했다. 한국으로 짧은 출장을 갈 때마다 어느 책 하나 허투루 고른 게 없으므로 놓아버리기 아쉬웠지만 한편 내 세상을 쪼개어 그들과 연대하는 일이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아무에게도 선택되지 못했다. 인터뷰로 이루어진 이 책은 목소리 소설이라 불린다. 소비에트 연방은 수많은 여자를 전쟁으로 내몰았지만 2차 전쟁의 승리 후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여자들을 외면했다. 그녀들은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제 발에 터무니없이 큰 군화를 신고, 남자 전용 군복의 밑단을 꿰매 입고 전쟁을 치렀고 끝내 살아남은 여자들이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한 무용담이 아닌 사랑을 이야기하고 전쟁 중에 본 이름 모를 꽃에 관해 이야기하는 여자들은 승리한 위대한 조국에 필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남자들의 전유물인 전쟁에 여자를 아니 소녀를 참여시켰다 건, 소비에트 연방으로서는 숨기고 싶은 역사일 것이다. 인터뷰이들은 어떤 결심으로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했고, 어떤 인터뷰이는 전쟁 중에 첫 생리를 시작하였으며 전쟁 중에도 사랑을 꽃피운 이야기를 했다. 내겐 참으로 애틋한 소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7권의 책을 구매한 남자분에게 선물해 드렸다. ‘전쟁’이 아닌 ‘여자’를 읽어주기를 바랐다.

열네 살이던 나는 처음으로 받은 한 달 용돈을 들고 동네 번화가에 있는 ‘로터리 서점’에서 미하엘 엔데의 <모모>를 샀다. 이국적인 건물에 누더기를 입은 소년에 끌렸다. 언니들에게 물려받은 책이 아니라 내 돈으로 내가 산 ‘나만의 책’이었다. <모모>를 가방에 넣어 다니며 쉬는 시간에 읽는 건, 무척 폼나는 일이었고 존재감 없던 나를 단박에 ‘문학소녀’로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모모>를 선택한 구매자에게 나의 첫 책은 선물로 드렸다. 겉표지가 무척 낡아 있었고 종이도 누렇게 변해서였지만 그보다 <모모>는 고작 $3.00에 팔아넘길 수 없는 내 소중한 유년의 기억이었으므로 뜻밖의 선물이라는 감상적인 건넴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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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obe Stock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 첫 페이지 빈 종이에 나는 이렇게 썼다.

‘명품 소비 1위의 국가에서 국군통수권이 없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이순신의 삶은 오로지 나라를 위한 삶이었던가? 군주가 된다는 건 아주 쓸쓸하고 두려운 일이다.’

<칼의 노래>는 내게 아픈 책이다. 퇴로가 없는 물목에서 항로를 선택해야 해야 했던 이순신의 삶이 그랬고 힘없는 나라의 운명이 그랬다. 여고 시절 열렬한 팬이었던 한국일보 문학기행의 필자가 김훈 작가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미 나는 그때 그의 언어와 문체에 감동했었다. 김훈의 문체는 간결하나 독자에게 방심하지 않도록 하는 힘이 있었다. 그 간결한 문체로 해서 작가의 감정을 주체하고 그 문장의 절과 행마다 독자들을 흐트러짐 없이 온전하게 끌어들였다. 작가는 어떤 언질도 주지 않으나 독자는 분노하고, 독자는 운다. 나는 그것을 ‘김훈체’라고 말한다. <칼의 노래>는 어여쁜 학생이 구매했다.

‘제 책이 어쩌다 건지섬까지 갔을까요? 아마도 책들은 저마다 일종의 은밀한 귀소본능이 있어서 자기한테 어울리는 독자를 찾아가는 모양이에요. 그게 사실이라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요.’

<건지 감자 껍질 파이 북클럽>에서 작가 줄리엣이 한 말이다. 내 책이 무생물의 내면에 숨겨진 은밀한 귀소본능으로 새로운 운명의 주인에게 닿아 그이와 함께 사랑을 나누고 행복하기를 바란다. 나는 책이 주는 순기능을 잘 알지 못한다. 비교적 책을 많이 읽은 내 삶이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으니 책은 그저 책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것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잔물결의 진동이 어느 때 나를 흔들고 내 사위를 흔들기 때문이다. 사위가 흔들리는 그 소리가 나는 설렌다. 무엇보다도 나는 쓸모에 집착하는 인간이 아니라 무쓸모에 연민하는 사람이다. 아흔두 권만큼의 종이 냄새가 덜 나는 서재에 들어와 문득, 오랫동안 내게 머물다 멀리 떠난 나의 책이 새로운 주인을 만나 무슨 일을 벌이고 있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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