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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올 사랑, 두렵지 않아

홍성철(문인협회)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Feb 12 2026 10:45 AM

수필이 있는 뜨락(24)


어느 날 아침, 무심코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았다. 그 안에는 중년을 넘어서는 사내가 서 있었다. 멋지게 살고 싶다던 청년은 어디로 갔을까. 대신 삶에 별 흥미도 없어 보이는 얼굴로, 그저 우두커니 서 있는 내가 있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생겼지?’
우울한 생각이 밀려오다 문득 이런 물음이 떠올랐다. 나를 불편하게 느끼는 나는 누구일까. 거울 속의 나인가, 아니면 거울을 바라보는 이쪽의 시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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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obe Stock

 

요즘 스마트폰은 전화기라기보다 검색기이자 작은 극장에 가깝다. 수돗물처럼 틀면 오락과 지식이 끝없이 흘러나온다. 운전할 때나 일할 때 이것저것 틀어 듣곤 한다. 얼마 전에는 프리드리히 니체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가 ‘아모르 파티’라는 말을 다시 마주했다. 예전에도 들은 적은 있지만, 낯선 라틴어라는 이유로 대충 넘기면서 그저 운명에 관한 이야기쯤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이 말이 자주 들리던 유행가 제목과 같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흥미가 생겼다. 노래 속 ‘파티’를 party로 생각해 ‘사랑의 잔치’쯤 되는 가벼운 유행가 가사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파티는 라틴어 fati, 영어로는 fate, 즉 운명을 뜻한다. 그래서 Amor fati는 ‘운명을 사랑하라’는 의미였다. 흘려듣던 노랫말을 다시 곱씹어 보니, 빠른 리듬 속에 니체의 말이 의외로 잘 담겨 있었다. 나의 선입견과 무지를 살짝 반성하며 듣는 “다가올 사랑 두렵지 않아, 아모르 파티”라는 가사가 새삼 귀에 남았다.

Amor fati. 니체의 이 짧은 문장은 주문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일상이 뻔하고 막연하게 느껴지던 어느 순간, 마치 창호지에 손가락으로 작은 구멍을 내어 세상을 내다보게 된 느낌이었다 . 그런데 그 틈으로 보인 것은 세상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흩어져 있던 생각들이 조금씩 모이며, 마음속에 조금씩 질서가 잡히기 시작했다.

더 행복해져야 한다는 기대가 오히려 나를 불편하게 만들어왔다는 사실이 보였다. 나를 과하게 부풀려 바라보고 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죽음을 아직은 한참 먼 이야기인 것으로 여기며 살아온 것처럼, 나 자신 역시 지나치게 크게 여겨왔던 것이다. 이것은 깨달음이라기보다, 몸으로 먼저 와 닿은 느낌에 가까웠다. 그 느낌은 오래 나를 감싸고, 나는 점차 작고 유한한 존재로서의 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먼지처럼 작은 기운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어 있고, 언젠가는 다시 흩어져 바람이 되고 강물이 되고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세상이라는 커다란 덩어리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다. 그 연결을 받아들이자, 나를 가두고 있던 좁은 틀이 문득 느슨해지는 것 같았다.

앤서니 드멜로 신부의 책 《유쾌한 깨달음》에 소금인형 이야기가 나온다. 세상을 여행하던 소금인형이 바다를 만나 그 거대함에 매혹되어 “당신은 누구입니까?” 하고 묻자, 바다는 이렇게 답한다.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직접 들어와 보면 알게 될 거야.”
소금인형이 바다로 들어가자 팔다리가 녹기 시작한다. 자신이라고 믿어온 것들이 사라질 때 두려움이 밀려왔지만, 사라질수록 바다가 무엇인지 더 분명히 알게 된다. 마지막 알갱이 하나만 남았을 때, 소금인형은 기쁜 목소리로 외친다.
“이제 알겠어. 네가 바로 나라는 걸. 나는 바다야.”
이 이야기는 고향을 찾는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고, 더 큰 존재로 돌아가는 여정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 어떤 이에게는 신에게 귀의하는 내용일 수도 있겠다. 내게는 작고 유한한 존재로서 좌절하지 않고 세상을 맞이하는 길을 조용히 알려주는 이야기처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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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obe Stock

 

 

노래 가사 중에서 특히 마음에 남는 구절은 “인생은 지금이야”였다. 이것은 되는 대로 살라는 말이 아닐 것이다.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을 잠시 내려놓고,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일 것이다. 나는 과연 지금에 살고 있는가. 어떻게 살아야 그것이 가능할까. 쉽지 않은 이 질문을 니체는 Amor fati라는 한마디 경구로 답한다. 능력도 수명도, 지식도 모두 유한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그 유한함 그대로 현재를 마주하라는 말처럼 들린다. 그러면 얽매임 없는 자유에 조금은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고.

이 생각은 다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으로 이어진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그래서 나는 자유다.”
그의 소설 속 인물, 그리스인 조르바가 바로 그런 삶을 살았다. 학식은 부족하지만,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지금 서 있는 현실에 온몸으로 몰입하는 캐릭터다. 많은 독자들이 사랑하고 작가 자신도 흠모했던 이 인물의 핵심 역시 Amor fati일 것이다.

작년에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살아오며 이룬 것 없이 나이만 들어간 것 같다고. 사실 나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때 함께 Amor fati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어땠을까. 어쩌면 말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설명으로 전해지는 말이 아니니까. 다만 나는 나 자신에게는 계속해서 묻고, 또 들려주어야 할 것이다. 거울을 마주하는 사람도 ‘나’이고, 나를 다시 지금 이 순간으로 데려오는 사람 역시 ‘나’이기 때문이다.

Amor fati!

 

문인협회-홍성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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