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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의 하루
김영수(문인협회)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Feb 19 2026 10:22 AM
수필이 있는 뜨락(25)
노을 자락이 붉다. 찰나에 스러질 태양은 호수에 잠겨 머리끝만 간신히 내놓고 오늘치의 빛을 닫고 있다. 나는 이제 시각이 아닌, 청각으로 호수를 느낄 뿐이다. 붉은 기운이 어둠에 묻히는 이 장엄한 순간, 자잘한 검은 곤충이 무리 지어 눈앞에 몰려든다. 기세가 사뭇 맹렬하다. 손을 휘저어도 쉬이 흩어지지 않고 무지막지한 춤사위로 정신을 어지럽히는 하루살이들. 그들도 인간처럼 무리를 벗어나는 게 두려워서 저리 떼를 지어 다니는 것일까. 아니면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아 죽기 전에 할 일을 마쳐야 한다는 초조감에서 저럴까. 내일 새로 태어난 하루살이들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하게 저들이 떠난 빈자리에서 또 다른 군무를 펼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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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로 몰려다니는 그들의 비행은 번식을 위한 짝짓기 수단이다. 1년 넘게 물가 흙 속에서 애벌레로 살다가 지상으로 올라와 날개 달린 곤충으로 살도록 허락받은 시간은 하루 남짓. 꿈을 안고 우화한 하루살이는, 원하던 날개를 얻는 대신 입이 퇴화한다고 한다. 먹지는 못해도 날아야 짝짓기를 할 수 있어서라고. 성충이 되어 겨우 하루를 살며 번식의 의무를 다하는데 그 하루조차 입이 없어 굶어 죽는다니. 내가 모르고 있던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하루살이는 해가 지면 몸의 균형을 잃는다고 한다. 흐릿한 불빛이라도 보이면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것은, 불빛 가까이 가면 균형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라고. 하지만 그토록 몸부림쳐도 그들 앞에 기다리는 건 허망한 죽음뿐이다. 어쩌면 하루살이들은 잃어가는 몸의 균형을 되찾을 수 있다는 환상 때문에, 자기 날개를 태워버릴지 모르는 불빛을 향해 달려드는 것일 수도 있다. 여름밤에 운전할 때면 헤드라이트 불빛에 부딪혀 죽는 하루살이 떼가 무참한 흔적을 남긴다. 필사적으로 불빛에 뛰어드는 하루살이를 보고, 제가 죽을 것도 모르고 달려드는 어리석은 곤충이라고 멋대로 판단한 나의 무지가 부끄럽다.
세상에 던져진 인간이 하루를 살기 위해 수많은 선택을 하는 것, 그것이 삶의 단면이다. 그리고 그 삶은 자기 자신과 타인에게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어제를 습관적으로 반복한다든가 낯설어도 새로움을 찾는다든가 하는 것도 선택이고,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무리에 섞여 지내는 것도 선택이다. 하루살이들이 불빛에 이끌려 몸을 태우는 일은 내재한 유전인자에 의한 본능적이고 무의식적인 행위다. 그렇더라도 결과에 따른 책임은 온전히 그들 몫이다.
그들은 제 몸에 날개가 돋기 전 애벌레로 지내던 시간을 기억하려나. 우화를 거치며 전혀 다른 세계로 편입되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을 때, 그러니까 자기 몸에 돋아난 날개를 보았을 때 어떤 느낌일까. 하루에 불과해도 그들에게는 한평생인데, 그 하루로 할 수 있는 일이 본능에 의한 번식뿐이라니. 짧지만 치열하게 사랑하고 떠나니 아쉽지 않을까. 주어진 시간 동안, 붉게 타오르는 태양과 푸른 하늘과 나무와 냇물을 보았을 것이다. 혹은 활짝 핀 꽃 향기와 비와 바람의 냄새도 맡았을지 모른다. 찰나에 지나가는 생이라는 걸 의식하여 자기만의 충실한 삶을 산 것도 있을 테고, 하루 이상의 시간 개념이 없으니 그저 순간을 즐기는 쾌락에 빠져 진정한 기쁨은 모르는 채 떠난 것도 있으리라.
하루살이에 비하면 나는 상대적으로 긴 인생을 살고 있다. 직장에 다니는 동안은 하루해가 짧을 만큼 열정으로 일했다. 퇴직 후 새로운 삶을 계획하면서 욕심낸 것이 문학이고 글쓰기였다. 어쩌다 보니 그리되었지만, 훌륭한 작가들의 그 찬란한 광휘를 탐한 것도 아니고 그들의 고독과 고뇌를 헤아리지 못한 것도 아니다. 어쩌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내 몸에서는 날개가 돋아날 것을 예비하고 있지 않았을까. 날개에 빛이 닿는 순간 놀랍게도 그 날개로 언어 사이를 날아다니게 된 것은 아닌지. 하루살이가 몸의 균형을 잡는 게 절실했던 것처럼, 문학은 내 정신의 균형을 잡기 위해 기꺼이 택한 방편이었는지 모른다.
흙 속에서 보내다가 정작 날개를 얻고 나서는 하루밖에 못 사는 하루살이에 비해, 인간에게는 어머니 자궁을 나온 후 100년 가까운 긴 세월이 주어진다. 100세 시대를 살며 수명이 늘어난 만큼 질적인 삶도 비례하여 나아졌는지. 본능이었든 사랑이었든 하루살이는 꿈꾸던 일을 하루 동안 이루었으려나. 하루라도 더 살고 싶다는 헛된 희망으로 아까운 삶을 허비하지는 않았으리라 추측한다. 인간보다 먼저 지구에 출현한 하루살이가 아직까지 멸종하지 않고 살아남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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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천천히 지나간다. 하루살이로서는 한 생이, 또 한 생이 흘러가는 것이다. 손톱만 한 하루살이 한 마리가 무리에서 떨어져나와 들풀 속에서 날갯짓한다. 뒤늦게 임무 수행 중인가. 회오리바람처럼 몰려와 한바탕 놀다 간 자리에 더는 아무것도 없다. 다른 하루살이들과 몸을 부대껴 몰려다닌 끝이 허탈하지는 않을지. 하루치의 빛이 닫히는 시간인데 어디선가 아주 가느다란 빛이 일렁인다. 삶이 그러하듯, 닫히는 동시에 열리는 시간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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