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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이 빚어내는 ‘초록’
황현수의 들은 풍월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Feb 19 2026 10:59 AM
아들 녀석이 ‘추워 밖에도 자주 못 나가는데…’하며 수경 재배나 하라고 ‘에어로가든(Aerogarden)’을 사주었다. 그런데 몇 년 전 겨울, 두 달 정도 고국을 다녀왔더니 화분이 모두 말라비틀어져 버린 일이 있었다. 그 뒤부터 겨울에는 아예 식물 키울 생각을 접었는데… 솔직히, 처음에는 수경 재배가 인공 빛과 물로 식물을 키우는 것이라 별 흥미를 못 느꼈다. 그런데 막상 거실 한복판에 초록이 밀고 올라오는 모습을 보니 신기하고 마음이 따듯해지는 것이다.

<에어로가든>에서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것은 바질(Basil)이다. 길쭉하게 올라온 줄기 끝에 하얀색과 연보라색의 작은 꽃들이 피었다.
여섯 개의 씨앗을 물에 담갔다. 처음 며칠은 아침마다, ‘언제 싹이 나오나?’ 싶어, 눈 뜨자마자 화분으로 가 문안을 드렸다. 1주 뒤 세 개가 싹을 틔웠고, 2주 지나서야 두 개가 뒤늦게 얼굴을 보였다. 하지만, 나머지 하나는 끝내 발아하지 못했다.
이곳 캐나다에서는 수경 재배로 바질, 민트, 오레가노, 레몬밤, 차이브 같은 허브를 주로 기르지만, 고국에서는 허브 외에도 깻잎이나 케일, 루꼴라, 갓, 치커리 등 같은 채소도 기른다고 한다.
이 수경 재배는 나 같은 ‘똥손’도 매일 물을 주지 않아도 되고, 흙에서 생기는 벌레가 없다는 점이 참 좋다. 물론 기계 값과 전기료 등을 따져보면 가성비는 별로다. 하지만, 식물을 키우며 느끼는 정서적 ‘놀이’나 ‘인테리어’적 가치로 보면 충분히 매력적이다.
2016년에 개봉된, 영화 <패신저스(Passengers)>는 행성으로 향하는 초거대 우주선 ‘아빌론’호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사고로 냉동실에서 90년을 일찍 깨어난 주인공들은 흙이 없는 우주선 바닥에 수경 재배 기술을 활용해 숲을 가꾼다. 식물을 가꾸며 시간을 보낸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식량을 넘어 인간에게 얼마나 정서적 안식처가 되는지를 보여 준다.
식량 전문가들은 수경 재배가 미래 인류의 안보를 책임질 ‘농업 혁명’의 핵심으로 본다. 이 방식은 땅 재배하는 방식에 비해, 물 사용량을 최대 90%나 줄일 수 있어 기후 위기 시대의 대안이 된다는 것이다.
도심의 빌딩이나 지하 공간에서 층층이 키울 수 있어 탄소 배출을 줄이고 신선한 식재료를 빠르게 공급한다. 폭염이나 가뭄 등 외부 환경과 관계없이 1년 내내 일정한 품질을 유지하며, 성장 속도도 20~30% 정도 빠르다고 한다. 영화처럼 화성 이주나 장거리 우주여행 시, 수경 재배는 식량과 산소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
수경 재배의 영어 표현인 ‘하이드로포닉스(hydroponics)’는 그리스어로 물(Hydro)과 노동(Ponos)의 합성어다. 즉, ‘물이 일하게 한다’는 뜻이다. 1930년대 캘리포니아 대학의 윌리엄 게릭(William Gericke) 교수가 거대한 수조에서 토마토를 수확하며 이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하지만, 이런 아이디어는 사실 오래전 고대 문명의 태동기와 맞닿아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바빌론의 공중정원(The Hanging Gardens of Babylon)>이다. 거대한 정원이 있었던 바빌론은 지금의 이라크 힐라(Hilla) 인근에 있었다. 현재의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약 85km 떨어진 곳으로 추측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신바빌로니아의 왕이 고향의 산과 들을 그리워하는 왕비를 위해 사막 한가운데 거대한 계단식 정원을 만들었다. 사막의 뜨거운 열기를 이겨내기 위해 고대인들은 경이로운 공학 기술을 발휘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 정원은 장대한 규모로 인해 진흙 벽돌로 이루어진 초록빛 산과 같이 보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공중정원>으로 추정되었던 유적지의 모습. 나무위키
근처, 유프라테스(Euphrates) 강에서 물을 끌어오기 위해 수천 명의 노예가 동원되었고, 증발을 막는 인공 수로가 만들어졌다. 사막의 뜨거운 열기는 땅의 모든 습기를 앗아가려 했지만, 노예들은 그 열기보다 더 뜨거운 사투를 벌였다.
수로가 닿지 않는 곳에서는 노예들이 일렬로 늘어섰다. 가죽 부대에 강물을 담아 어깨에 메고, 다음 사람에게 전달하고,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정원 아래층 연못에 도착한 물은 차곡차곡 저장된다. 수십 미터 높이의 정원 꼭대기까지 물을 올리기 위해 사용된 것은 ‘버킷 체인(bucket chain)’이었다.
거대한 두 바퀴 사이에 체인을 걸고 수백 개의 구리 양동이를 매단다. 그리고 노예들이 바퀴를 돌려 양동이에 물을 담아 꼭대기로 실어 날랐다. 꼭대기 커다란 저수조에 모인 물은 이제 미로처럼 연결된 작은 수로를 따라 아래, 아래로 흘러내려간다.
옥상에서 시작된 물길은 꽃의 뿌리를 어루만지고, 바위 사이로 작은 폭포를 만들며 마치 정원 전체가 숨을 쉬듯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낸다. 왕비는 사막 한복판에서 들려오는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고향의 시냇가를 떠올렸을 것이다.
수천 년이 흘렀어도 사람들은 늘 같은 꿈을 꾼다. 메마른 곳에 초록을 키우고, 그 안에서 마음의 쉼터를 찾는 꿈 말이다. 오늘도 나는 거실에 앉아 ‘초록’을 바라본다. 작은 바질이 램프 빛 아래에서 반짝이며 속삭이는 듯하다. “괜찮아요. 겨울은 좀 길지만, 이제 곧 봄이 올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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