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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상단(商團) 놈들은 아주 개차반이더군”
황현수의 들은 풍월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Mar 05 2026 12:03 PM
고국에 가면 잠을 설쳐, 해가 미처 뜨지도 않은 시간에 숙소 근처를 산책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던 중, 달빛의 끄트머리 사이로 택배 기사들이 물건을 나르는 모습을 보면서 ‘참, 부지런히 열심히들 산다’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내가 이민을 떠나기 전에는 보지 못했던 낯선 장면이다.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하루의 일상이 끝나는 늦은 밤. 내일 아침 반찬거리를 걱정하던 주부는 쿠팡 같은 쇼핑 플랫폼(Platfom)으로 먹거리를 주문한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문을 열면 주문한 식재료가 놓여 있다.
이제 퇴근길에 무거운 짐을 들고 장을 보거나 주말에 마트에서 줄을 설 필요가 없다. 그 시간에 아이와 놀아 주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당일 오전 0시부터 오전 11시까지 상품을 주문하면 오늘 도착하고, 내일 배송은 오전 11시부터 시까지 주문하면 다음날 받아 볼 수 있는 보장 서비스다.
이른바 ‘로켓 배송’이라는 쇼핑 혁명은 제주도나 산간 오지에서도 대도시와 동일한 가격이나 속도로 물건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플랫폼이 단순히 중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물건을 사서 책임지고 배송하는 시스템이라고 하니, 품질 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
이제 손가락 하나로 문 앞까지 내가 원하는 물건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이다. 전국의 장터를 다 뒤져도 못 찾을 물건을 클릭 한 번으로 가격을 비교할 수도 있고, 밤새 마음이 바뀌면 반품을 해도 된단다.
하지만, 이러한 편리한 인터넷 쇼핑 방식은 ‘개인 정보 유출’이라는 해킹 불안이 숨어 있었다. 최근에 쿠팡의 고객 사태에서 보듯, 플랫폼은 거대한 객주(客主)가 되었지만, 데이터 보안이라는 ‘울타리’ 설치에는 너무 인색하거나 관리를 소홀히 했다.
언론을 통해 보면, 이익은 로켓처럼 빠르게 챙기고 사고에 대한 책임은 거북이 보다 느리다. 사태를 처리하는 ‘상업적 도덕 결핍’도 문제다. 로켓 배송을 위해 밤낮없이 뛰는 배송 기사와 물류 센터의 노동자들의 고통은 또 다른 윤리 부재와 문제를 증폭시키고 있다.
마침, 새해부터 옛 보부상들의 일상을 다룬 만화 <객주>를 보고 있다. 보부상은 조선시대에 물건을 판매하던 전문 떠돌이 상인을 말한다. 이두호 화백이 1988년부터 5년 6개월 동안, <매주 만화>라는 잡지에 연재한 것을 <스포츠 서울>이 단행본으로 묶은 것이다. 그 뒤 10권의 전집 형태로 갖춰 출간했는데, 이민 올 때 아는 선배가 ‘조국을 잊지 말게!’ 하며 한 질을 선물해 주었다.
이제는 전에 읽었던 기억도 희미해, 처음 보는 듯 책장을 넘기는데 갈수록 흥미가 진진하다. 1943년생인 이두호 화백은 홍익대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펜화를 보고 있으면 섬세한 표현에 탄복하게 된다.
등장인물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광대뼈의 굴곡, 깊게 파인 팔자 주름, 번들거리는 눈빛 등을 미세한 선으로 그려냈다. 또한 초가집의 짚단 하나, 기와지붕의 이끼, 장터 주막의 때 묻은 멍석까지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그의 배경을 보고 있으면 장터의 왁자지껄한 소리와 국밥집의 김 오르는 냄새가 느껴진다.

이두호 화백의 만화 <객주>는 등장 인물의 광대뼈의 굴곡, 깊게 파인 팔자 주름, 번들거리는 눈빛 등을 미세한 선으로 그려냈다.
줄거리는 조선 후기, 봉건 질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싹트던 격동기를 배경으로 보부상(장돌뱅이)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룬다. 돈과 권력이 판치는 세상에서 주인공은 보부상의 권익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결국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보부청이 해산되는 아픔을 겪지만, 그는 장사치의 이익보다는 사람 사이의 신용을 남기며 민초들의 영웅으로 거듭 난다.
조선 시대 우리 민족의 옷과 장터의 구조, 보부상들의 모습 등을 생생한 현장감으로 완벽하게 재현했다. 지배 계급의 이야기가 아닌, 길 위에서 잠자고 장터에서 밥 먹는 민초들의 걸쭉한 입담과 해학들을 담아내어 만화의 문학적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다.
이 만화를 보면 매끄럽지는 않지만, 흙과 땀 냄새나는 우리말이 풍성하게 나온다.
“그놈 참, 째마리 같은 인생이로구나” 째마리는 ‘사람이나 물건 가운데서 가장 못된 찌꺼기’를 뜻하는데, 보부상들이 스스로를 낮추거나 볼품없는 처지를 가리킬 때 쓰는 단어였다.
“그 상단(商團) 놈들은 아주 개차반이더군” 개가 먹은 음식(똥)이라는 뜻으로 행실이 더러운 사람을 욕할 때 썼다. 남의 뒤통수를 치는 악덕 상인을 향해 내뱉는 욕설로 자주 나온다.

만화 <객주>의 섬세한 펜화는 장터의 왁자지껄한 소리와 국밥집의 김 오르는 냄새가 느껴진다.
“참, 시러베아들 놈 같으니라고!” ‘실없는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말로 앞 뒤 안 가리고 허풍만 떠는 사람을 타박하는 말이다.
“그 여인, 참 정갈하고 매시근한 맛이 있구먼.” ‘매시근하다’는 사람이 야무지고 맵시가 있다는 옛 표현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품위가 있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극찬하는 말이다.
만화 <객주>에서 보부상은 “장사는 이문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요즘 같은 AI 시대에 고객이 기업에게 개인의 정보를 맡긴 것은 ‘그 기업의 서비스를 믿겠다’는 계약적 신뢰다. 이를 소홀히 다룬다는 것은 보부상이 남의 물건을 훔쳐 도망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큰 객주(플랫폼)가 될수록 그에 걸 맞는 ‘상인의 도량’이 필요하다.
옛 보부상들은 봇짐을 도둑맞으면 상단 전체가 나서서 해결할 만큼 책임을 중시했다. 어찌 보면, 쿠팡의 정보 유출 책임 회피는 국가 간 분쟁의 의제가 될 정도로 꼬여 버렸다. 쿠팡 같은 거대 객주가 ‘워싱턴 권력’의 뒤에 숨어 부도덕한 로비를 하고 있는 모습은 참, 개차반스럽다.
‘미국 기업이 부당하게 한국 국회에 끌려가 조리돌림을 당했다’며 미 국회에 일러바치는 모습은 ‘큰 상단’이 할 태도가 아니다. 한국에서 돈을 벌려면, 옛 보부상들이 메고 다니던 ‘정직한 봇짐’의 삶을 다시 한번 되새겨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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