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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무희의 다른 인격...

‘도라미’는 자신을 지키려 불러낸 ‘또 다른 나’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Mar 08 2026 10:28 AM

드라마 ‘이 사랑 통역 되나요?’의 차무희


유튜브 댓글창이나 메일로 요즘 비슷한 질문들이 들어왔다. "선생님, 넷플릭스 '이 사랑 통역 되나요?' 리뷰해 주세요!" "차무희(고윤정) 다중 인격 맞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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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시리즈 '이 사랑 통역 되나요?'의 주호진(김선호)과 차무희(고윤정). 넷플릭스 제공

 

드라마는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통역사 주호진(김선호)과 무명 배우 차무희가 일본에서 우연히 만나며 시작한다. 짧은 만남과 헤어짐 이후 한국에 돌아온 무희는 촬영 도중 추락 사고를 당해 수개월 동안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난다. 무희가 잠들어 있는 사이 그녀의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두고 다시 깨어난 무희는 전 세계적인 스타가 돼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도라미'라는 다른 인격이 튀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호진은 세계적인 스타가 된 무희의 통역을 맡으면서 재회하고, 그녀와 점차 가까워진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 차갑게 선을 긋던 무희가 갑자기 울면서 매달리기도 하고, 자신이 한 말을 도라미가 한 것이라며 부정하기도 한다. 말투도 태도도 눈빛도 완전히 다른 두 모습 사이에서 호진은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혼란스럽다. 드라마를 보다 보면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무희는 인격이 나뉜 걸까?" 톱스타 차무희 곁에 늘 따라다니는 또 다른 존재, 도라미.

댓글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무희의 진단은 흔히 '다중 인격'이라 불리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에서는 A 인격이 한 일을 B 인격이 알지 못하는데, 무희 역시 도라미가 몸을 조종하는 동안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전형적인 해리성 정체감 장애의 사례에서 각 인격이 서로 다른 이름, 나이, 성별은 물론 독자적인 기억 체계를 갖기도 하는 것과 달리 도라미는 독립된 인생사나 별도의 기억을 갖고 있지 않고 무희가 출연한 영화 속 캐릭터에서 비롯됐다. 진단명이 무엇인지가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무희에게 도라미가 왜 필요했는지, 왜 마음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이런 극단적인 방법까지 동원해야 했는지가 아닐까?
 


나를 지키려 나타난 '또 다른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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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랑 통역 되나요?'에서 시상식에 참석한 무희 앞에 환영처럼 등장한 '도라미'. 넷플릭스 제공

 

무희는 원래부터 감정을 잘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그저 내성적인 성격 때문이 아니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뒤 친척 집에서 눈치를 보며 자라야 했던 무희에게 세상은 "울어도 괜찮아"라고 말해 주지 않았다. 무희를 거둔 큰아버지는 무희를 짐처럼 대했다. 어린 무희는 '내가 여기서 울고 떼를 쓰면 나를 돌봐줄 이 사람들에게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겠구나. 그러면 나는 갈 곳이 없어지겠구나' 같은 두려움이 있었을지 모른다. 어린 무희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도 울지 않는다. 큰아버지는 그런 무희를 보고 ‘영악한 아이’라며 박대했다. 슬퍼하면 짐이 되고, 참아 내면 영악한 아이가 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운데 무희는 결국 감정을 숨기는 쪽을 택한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자기 안의 감정들을 죽이고, 그 자리에 연기를 채워넣기 시작한 것이다.

촬영장에서의 추락 사고는 그렇게 단단히 묶여 있던 끈을 갑자기 풀어 버린 사건이었다. 극도의 불안 속에서 무희의 마음은 자신을 지켜 줄 강한 외피를 불러온다. 바로 자신을 스타로 만든 영화 속 캐릭터 도라미다. 도라미는 무희가 하지 못했던 말을 대신하고, 무희가 느끼지 못하도록 막아 두었던 감정을 대신 드러낸다. 기억, 의식, 정체감 등이 갑작스럽게 변화하는 증상인 ‘해리’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작동하는 방어기제의 일종이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 들이닥쳤을 때 그걸 정면으로 받으면 무너질 수 있으니 마음은 그 감정을 나와 분리시킨다. '이건 내가 한 게 아니야', '이건 내 감정이 아니야'라는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이다.

무희의 해리 상태는 한 가지로 고정돼 있지 않다. 무희 옆에 환영처럼 나타나는 도라미가 있다. 이때 무희는 도라미를 보고, 도라미가 하는 말을 듣는다. 무희는 도라미를 인식하고 기억한다. 도라미가 무희의 몸을 완전히 가져가는 순간들도 있다. 이때 무희는 그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함께 해외를 다니며 연애 프로그램을 촬영하는 일본인 배우 히로(후쿠시 소타)에게 키스한 일도, 큰아버지 앞에서 욕을 한 일도 무희는 모른다. 무희로 돌아온 뒤에야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도라미가 또 뭔가 했구나'를 짐작할 뿐이다. 이 두 상태가 한 사람 안에서 오간다는 것 자체가 해리라는 증상의 스펙트럼을 보여 준다. 누구나 멍하게 운전하다가 목적지에 도착해서 "어떻게 왔지?" 하는 순간이 있다. 그것도 아주 가벼운 수준의 해리일 수 있다. 무희는 그 스펙트럼에서 훨씬 깊은 쪽에 있는 것이다.

과거 SBS '세상에 이런 일이' 의학 자문을 하며 만났던 성진(가명)씨는 어린 시절 반복적인 성폭력 외상 이후 기억의 공백,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말투와 행동, 그리고 남성 신체 안에 여성 인격이 존재하는 모습을 보였다. 처음에는 더 많은 정체성이 있었지만, 치료가 진행되면서 일부는 통합되었고, 요즘에는 여성 인격으로 활동한 기억을 본인이 알고 있기도 하다고 했다. 완전히 기억이 끊어졌던 상태에서 기억은 하되 감정적 거리를 두는 쪽으로 조금씩 이동한 것이다. 성진씨의 사례에서도 마음이 스스로를 지키려 했다는 점은 같다. 감당할 수 없는 외상이 반복됐을 때 마음은 그 고통을 '다른 나'에게 넘기는 방식으로 버텼다.
 


자기 파괴 이면에 숨은 두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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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랑 통역 되나요?'에서 호진(가운데)이 원래 인격으로 돌아와 히로와 대화하는 무희를 바라보고 있다. 넷플릭스 제공

 

무희의 도라미도 같은 맥락이다. 무희가 무너지지 않도록 무희 대신 감정을 표현하고 대신 싸워준다. 차갑게 선을 긋는 무희와 거침없이 치고 들어오는 도라미. 같은 사람의 두 모습 사이에서 호진은 혼란스럽다. "약점을 숨긴다고 거꾸로 말하고 홧김에 막말하는 당신의 언어는 나한테 너무 어려워요." 여섯 개 국어를 구사하는 통역사에게도 무희의 말은 이해하기 어려운 언어다. 하지만 무희에게는 회피하는 자신도 진짜고 대신 소리쳐 주는 도라미도 진짜다.

무희가 호진을 사랑하게 될수록 도라미는 더 자주 등장한다. 외상을 겪은 사람에게 친밀함은 항상 안전한 것만이 아니다. 가까워졌다가 나중에 더 큰 상처를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커지는 일도 흔하다. 호진이 무희의 깊은 속을 들여다보려 할수록 무희의 마음속 경고등이 켜지는 것만 같다. '이만큼 가까워지면 숨겨온 진실이 드러날 거야. 그러면 결국 버려질 거야.'

진료실에서도 비슷한 패턴을 자주 경험한다.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더 불안해하고, 상대를 밀어내거나, 갑자기 연락을 끊거나, 일부러 관계를 망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겉으로는 자기 파괴처럼 보이지만, 그 마음 안쪽을 들여다보면 '차라리 내가 먼저 끝내는 게 덜 아프다'는 방어가 작동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호진도 결국 그걸 알아차린다. 도라미가 하는 말이 사실은 무희가 하고 싶었던 말이라는 것을. 호진은 단순히 언어를 소통하는 통역사를 넘어 무희의 흩어진 마음을 이어주는 사람처럼 보인다.
 


인정에서 출발하는 '진짜 통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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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랑 통역 되나요?'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해리 증상을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주변 사람들은 어느 쪽이 가짜인지를 묻는다. 그런데 이 질문을 받을수록 환자는 더 숨는다. 내 일부가 가짜로 취급당하는 순간 그 부분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짜를 가려내는 게 아니라 여러 모습 모두 그 사람의 일부라는 걸 인정해주는 것이 우선이다. 그 인정이 있어야 흩어진 조각들이 다시 하나로 모일 가능성이 생긴다. 호진은 도라미를 없애려 하지 않았다. 도라미의 말 뒤에 있는 무희의 감정을 읽으려 했다. 말의 뜻이 아니라 말 뒤에 숨은 감정까지 읽으려는 과정. 어쩌면 그게 이 드라마가 말하는 진짜 '통역'이지 않을까.

"선생님, 제가 느끼는 감정이 진짜인지 모르겠어요." "이게 제 마음인지, 꾸며낸 건지 헷갈려요." 감정은 진짜 아니면 가짜로 나뉘지 않는다. 때로는 여러 감정이 동시에 존재하고, 상황에 따라 다른 목소리로 나타날 뿐이다. '이 사랑 통역 되나요?'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은 사람이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낸 방식을 ‘해리’라는 현상으로 보여준다. 마음은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하기도 한다. 감정을 꺼버리기도 하고, 다른 '나'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기억을 잘라내기도 한다.

이해하기 어려운 여러 감정들이 올라왔을 때 "어느 쪽이 진짜냐"고 묻는 대신 이 감정들은 어디서 왔고 나를 어떻게 지키려고 하는지 들여다보면 좋겠다. 통역이 필요한 건 사랑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일지도 모른다.

허규형 연세가산숲정신건강의학과의원 대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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