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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 같은 곳에서

김정수(문인협회)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Mar 19 2026 10:46 AM

수필이 있는 뜨락(29)


에메랄드 빛 바다는 투명하고, 은빛 모래사장은 눈부시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야말로 낙원과도 같다. 십여 일째 이곳 카리브해 휴양지에서 머물며 나는 오직 내가 원하는 것만 하며 지냈다. 시간의 흐름조차 잊을 정도로.

 

screenshot 2026-03-19 at 10.43.16 am.png
Adobe Stock

 

​처음 며칠은 만족 그 자체였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일정도 없었고, 책임도 없었으며, 해야 할 일도 없었다. 아침에는 느지막이 일어나 산해진미가 차려진 뷔페식당에서 브런치를 하고, 낮에는 그늘에서 원하는 책을 실컷 읽으면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저녁이면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분위기 있는 식사를 한 뒤 바닷바람을 쐬며 산책하곤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낯설고 묘한 감정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무언가 부족한 듯한... 정확히 무엇이 부족한지 알 수는 없지만, 완벽한 환경 속에서도 내 마음은 이상하게 불만스럽고 허전하기만 하다.

​
낙원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흔히 낙원을 모든 것이 갖춰진 완벽한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불편함도 없고, 갈등도 없고, 부족함도 없는 곳에서 우리는 진정한 만족을 느낄 수 있을까?

​
문득 영화 ‘아일랜드’가 떠오른다. 그곳에는 낙원에서 생활한다고 세뇌당한 복제인간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스폰서인 진짜 인간들에게 장기나 신체 부위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들이다. 그들은 일하지 않고 먹여주고 재워주는 낙원 같은 곳에 살면서도 더 나은 낙원을 꿈꾼다. 그들이 꿈꾸는 더 나은 낙원의 실체란, 스폰서 인간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섬을 벗어나는 티켓을 획득하여 수술대에 오름으로써 최후를 맞는 곳이다. 물론 복제인간들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낙원에 산다고 세뇌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낙원을 꿈꾸는 인간의 심리를 색다르게 조명한 부분이 내게는 퍽 인상적인 영화였다. 이곳에서의 나도 그들 복제인간이 꿈꾸는 새로운 세계로의 탈출을 갈망하고 있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듯하다.

​돌이켜보면, 내 삶에서 상당히 의미 있었던 순간들은 완벽하지 않은 가운데에서 찾아왔다. 힘들게 도전한 끝에 얻은 성취, 실패의 아픔 속에서 발견한 깨달음, 예상치 못한 위기 속에서 새롭게 형성된 관계들. 기쁨은 고통과 대비되었기에 더욱 빛났다. 두려움을 경험했기에 용기의 가치를 알았고, 슬픔을 겪었기에 작은 행복에도 감사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지루해진 이유는 어쩌면 감정의 굴곡이 사라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감동이란 대비에서 오는 법이다. 뜨거운 여름을 보내야 겨울의 차디찬 적막함을 느낄 수 있고, 오랜 단절 끝에 만난 사람과의 대화는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일정하다. 날씨도, 풍경도, 심지어 나의 감정조차도. 마치 한 장의 그림 속에 갇혀 있는 듯한 기분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감정을 숨기는 법을 몰랐다. 기쁘면 소리 내어 웃었고, 슬프면 거리낌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감정을 절제하는 것이 성숙한 태도라고 배우게 되었다. 감정을 억제하는 것이 사회적인 미덕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그런 삶 속에서 나는 진짜 감동을 느끼는 순간조차 놓쳐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슬픔을 알기에 감미로운 음악에 감동할 수 있고, 두려움을 경험했기에 스릴러 영화 속 긴장감에 몰입할 수 있다.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처럼 고난을 모르고 살아온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 이상하리만큼 그 깊이가 얕게 느껴진다. 반면, 삶의 굴곡을 겪으며 살아온 사람들과의 대화는 짙은 여운을 남긴다. 그들은 경험을 통해 삶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만큼 더 깊이 있는 감정을 표현하기 때문이리라.

​우리 대부분은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지만, 완전한 만족이란 결코 지속될 수 없는 감정이다. 만족이 오래 지속되면 우리는 곧 새로운 만족을 갈망하게 된다. 그러므로 행복이란 단순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 자체일지도 모른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단조로워질수록, 나는 점점 일상의 소소한 불완전함이 그리워진다.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느끼는 생생한 감각, 북적이는 카페에서 주고받는 짧은 대화, 분주한 도시 속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 그런 모든 것들이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요소들이 아니었을까?

​
완벽한 낙원 같은 곳에서도 나는 불완전함을 갈망하고 있다. 그러면서 깨닫는다. 진정한 낙원이란 결코 완벽한 환경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변화와 도전, 감정의 기복이 있는 삶 속에서 비로소 진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따뜻하지만 끈적한 습기를 느끼면서 나는 어느새 토론토의 혹독한 겨울을 그리워하는 중이다.

화면 캡처 2025-09-26 141058.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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