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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신(節臣)과 충신(忠臣)
박형규(시인·토론토)
-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public@koreatimes.net)
- Mar 20 2026 11:38 AM
지금 한국의 장항준(張抗俊: 1969~, 대구 출생) 감독 진두지휘 아래 박지훈, 유해진, 유지태, 전미도, 이준혁 등이 열연한 ‘왕과 사는 남자(King’s Warden)’가 한국 극장가에 1400만 명이상의 관객을 동원함은 물론 북미와 유럽(영국)의 극장가에도 연일 많은 관객들을 운집시키는 흥행돌풍을 일으키면서 남녀노소와 인종 및 국경을 초월하여 많은 국내 및 세계인들에게 하염없는 웃음과 눈물을 터트리게 하고 있다.
이 영화는 비운(悲運)의 조선 6대 단종(端宗, 1441~1457) 임금의 12세에 즉위(1452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의 계유정난(1453년)에 이은 선위(禪位)와 폐위(廢位) 후 상왕(上王)으로 퇴임(退任)(1455년)과 사육신(死六臣) 등의 단종 복위운동 실패에 따른 문책성 처벌을 받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된 후 육지고도(陸地孤島)인 영월(寧越) 청령포(淸泠浦)로 유배되어 약 4개월 간 청령포와 관풍헌(觀風軒)에서 귀양살이를 하다 1457년 음력 10월 24일 17세에 승하(昇遐)한 파란만장한 일생을 다루고 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쇼박스 제공
청령포는 영월 북서쪽의 평창강과 주천강이 합류하여 이루는 서강(西江)이 삼면을 굽이치며 서쪽은 육륙봉(六六峰) 절벽으로 막혀 있어 나룻배 없이는 외출이 불가능한 유배지인데 이곳에서 단종은 궁에서 함께 내려온 상궁 매화(梅花)와 현지인 광천골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 1404-1474)를 포함한 빈천하고 천학무지한 현지 평민들과의 짧은 동고동락(同苦同樂) 속에서 군민일체(君民一體)의 평범한 삶을 추구하다 경북 순흥(順興)에 유배 중이던 숙부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서인(庶人)으로 이차 강등된 후 세조로부터 사약을 받고 17세의 어린 나이에 승하한다.
세조는 東江(동강)에 투척한 단종의 시신을 아무도 수습하지 못하게 하려고 시신수습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지엄한 명령을 내려 단종의 시신이 동강 하류를 거쳐 남한강(南漢江)으로 유입되지 않고 그 일대를 계속하여 떠돌게 되었다. 이를 목격한 엄흥도는 야음(夜陰)을 틈타 혹한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세 명의 아들과 함께 동강에 뛰어들어 긴급히 그 시신을 수습한 후 영월 북쪽에 있는 자신의 선산 동을지(冬乙㫖)로 급히 이동하여 모친을 위해 준비했던 수의(壽衣)를 시신에 대신 입힌 후 엄동설한의 산속에서 다행히 노루 한 마리가 앉았다 황급히 떠난 곳의 흙을 파내고 임금의 시신을 가매장한 후 세 아들의 성씨를 모두 바꾸고 각기 다른 곳으로 피신하라고 명령을 했으며, 본인도 지체없이 먼 곳을 향해 피신길에 올랐다고 한다. 이렇듯 단종을 위해 절개를 바친 절신(節臣) 嚴興道는 평소 자식들에게 “爲善被禍(위선피화: 선을 행하다 화를 입어도) 吾所甘心(오소감심: 내가 마음으로 달게 받는 바다)”는 명언을 남겨 위국헌신(爲國獻身: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침)의 확고한 신념과 용기를 지닌 절신이요 의인이었다.
단종 승하 후 약 80 여년이 지난 중종(中宗)시대에 7개월 동안 세 명의 영월군수가 부임하는 당일 밤에 급사하는 일이 연발하자 나중에는 영월이 폐읍이 될 지경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때 병조정랑, 이조정랑에 이어 3년간 조부상을 치른 후 승문원(承文院) 교검(校檢)을 지낸 朴忠元(박충원: 1507-1581)이 자청하여 중종 36년(1541년) 9월 영월군수로 부임하였다. 그는 그날 밤 의관을 정제한 후 관아에 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찬 바람이 불어 촛불이 꺼지자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를 입은 소년왕이 신하를 거느리고 등장했다. 신임군수는 곧 단종임을 직감하고 바닥에 머리 숙여 절을 올리자 단종은 “내가 죽을 때 목을 조른 활줄이 아직 남아 있어 목이 갑갑해 그것을 풀어 달라고 하려고 왔는데 지금까지의 영월군수들은 겁이 많아 나를 보자마자 급사하였다.” 이에 신임 박군수가 단종 시신의 매장지를 묻자 단종은 “엄흥도 호장이 알 것이다.”하며 홀연히 사라졌다.
다음 날 박충원 군수는 엄흥도 후손을 수소문 끝에 찾아내 가시덤불과 잡초로 뒤덮힌 단종의 가매장지를 발견했으며, 시신을 살펴보니 과연 목에 활줄이 얽혀 있어 활줄을 푼 뒤 다시 매장하고 제문과 전물(奠物)을 준비하고 제사를 올리게 되었다. 박충원 군수는 “왕실의 맏아들이며 어리신 임금께서 불운의 명을 만나 외진 이곳으로 쫓겨 나셨으니 만고의 원통한 혼이시어 부디 강림하시어 이 음식을 흠향하소서.”라는 제문을 봉축하며 정성을 다해 제사를 올렸다. 그날 밤에 단종 임금이 박군수에게 재차 현몽하여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퇴장했는데 목에 활줄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제사를 지낸 후 박충원 군수는 중종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왕명에 의해 봉분을 조성하여 왕릉을 봉축(封築)하는 한편, 엄흥도의 후손을 찾아 그 왕릉을 관리하게 했다. 그 후 박군수는 영월에서 5 년간 매일같이 밤마다 독서하고 백성 대하기를 한 집안 식구를 대하듯이 했으며 임기를 마치고 박충원 군수가 떠나자 영월군민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음은 물론 그 후로 영월군수가 급사하는 일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공로로 朴忠元은 1564년(명종 19년) 명종 임금으로부터 ‘大提學兵曹判書朴忠元(대제학병조판서박충원)’이라는 친필을 하사받게 되었다.
이처럼 朴忠元은 세 명의 전임군수들이 부임 당일 급사하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침착하게 현몽한 단종 임금의 부탁을 경청하여 80여 년간 질식의 고통을 준 활줄을 제거한 후 제문과 전물을 준비하여 제사를 올리고, 정식으로 중종 임금께 상소를 올려 왕릉을 재정비함은 물론 嚴興道의 후손으로 하여금 그 왕릉을 관리하게 했으니 國王과 郡民을 위해 盡忠報國(진충보국: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 보답함)한 현명한 충신이요 의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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