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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 깃든 황혼
이현수 (토론토)
-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public@koreatimes.net)
- Mar 23 2026 01:05 PM
“노인은 추억 속에 산다”라는 말에는 어딘가 모르게 쓸쓸한 기운이 서려 있다. 마치 노년이 현재를 외면한 채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에만 매달리는 삶으로 폄훼하는 듯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의미가 드러난다. 그것은 폄훼가 아니라,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한 사람이 축적해 온 경험의 깊이와 삶의 풍요로움을 인정하는 말이다.
바쁜 직장 생활을 마치고 은퇴하면 하루의 리듬은 눈에 띄게 달라진다. 매시간을 채우던 업무와 책임은 사라지고, 시간은 느슨하게 흐른다. 이렇게 새로 생겨난 시간의 여백 속에서 오래전의 기억들이 서서히 떠오른다.
기억 속에서 노인은 희망과 포부로 가득하던 젊은 시절로 되돌아 가기도 하고, 이미 끝난 사건들에 다른 결말을 상상해 보며, 걸어온 길과 선택하지 않았던 길을 차분히 되짚어 본다. 기억은 서두르지 않는 성찰이라는 귀한 특권을 허락하고, 마음속에 오래 남아 있던 미해결의 감정과 화해하도록 이끈다. 노년에게 기억은 피난처이자, 남은 생을 지탱해 주는 마지막 사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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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본다면 “노인은 추억 속에 산다”라는 말은 탄식이 아니라, 성실하고 충만하게 살아낸 삶이 얻은 특권에 대한 인정이다. 기억 없이 늙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깊은 고독일 것이다. 기억은 시간이 건네는 선물이며, 노인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그 선물을 조용히 하나씩 풀어 본다.
내가 팔순을 넘겼다는 사실은 아직도 완전히 실감 나지 않지만,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다. 노인이 된 지금, 내 안에 쌓인 기억들은 앞으로의 기대보다 훨씬 더 풍요롭게 느껴진다. 앞날은 불확실하고 한정되어 있지만, 지나온 시간은 넓고도 겹겹이 쌓여 있으며 지극히 개인적인 의미로 가득 차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인간관계의 폭이 자연스레 좁아져 나는 점점 더 많은 시간을 혼자 보내며 기억 속을 거닌다. 그러나 그 고독은 공허하지 않다. 회상의 순간들은 후회나 그리움에 머무르지 않고, 내 삶이 헛되지 않았다는 조용한 확인이 되어 준다.
이 모든 기억을 품은 채 여전히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남은 날들 속에서 내가 누리는 가장 큰 위안이다. 추억이 깃든 황혼은 값진 계절이다. 이미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며, 그 안에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시간이다.

이현수 (토론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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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public@koreatimes.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