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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걷는 이유

박엘리야(문인협회)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Apr 02 2026 03:45 PM

수필이 있는 뜨락(31)


무거워진 다리로 숙소에 도착하니 뿌연 유리문 사이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11월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은 비가 많이 와서 대기가 습기로 빽빽했다. 순례자용 호스텔에 머무는 사람들 모두 머리부터 신발까지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실내에서 쏟아지는 비를 피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해 보였다. 주방에서 저녁을 만들고 있는데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이 두 명이 나타났다. 한 명은 머리를 허리까지 기른 키가 큰 남자였고 한 명은 총명한 눈빛을 가진 건강해 보이는 여자였다. 그 둘은 조용하고 신속하게 각자 맡은 요리를 하더니 맞은편 테이블에 앉으며 인사를 건넸다. 빛나는 눈을 가진 여자가 자기들은 독일에 있는 집에서 출발해 유럽 전역을 자전거로 일주하는 중이라고 했다. 서너 달째 길에서 살고 있는 그들의 여정은 이주 뒤면 끝을 맞이하게 된다며 그간 달려 온 지도를 보여주었다. 해안을 따라 유럽을 한 바퀴 돌아 스페인에 이르렀고 마지막으로 포르투갈만 남아 있었다. 이들은 텐트와 식기를 모두 들고 다녀서 대부분의 밤을 텐트에서 보내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이런 호스텔에 들러 몸을 씻고 인간의 행색을 갖춘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적은 돈으로 오래 여행할 수 있을 것이고 도착하는 곳에 숙소가 있는지 같은 고민에도 얽매일 필요도 없을 것이었다. 이를 듣고 있던 나의 일행이 저들은 이 세상에서 두려워할 게 없겠다 하고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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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t GPT 생성 이미지

 

그 자리에 모인 우리들은 순례길을 걷는 순례자들이었다. 까미노라고도 불리는 산티아고 순례길은 스페인에 있는 Santiago de Compostella라는 성지까지 대개 몇백 킬로미터를 걷는 장거리 트레일이다. 원래 종교적인 의미로 만들어진 길이지만 지금은 전 세계에서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그 길을 걷는다. 순례자들은 길에 따라 일주일에서 한 달 넘게까지 걸으며 꽤 긴 기간을 길 위에서 생활한다. 순례자로서 나는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등에 짊어지고 하루 종일 걷다가 걸을 만큼 걸었다 싶으면 눈앞에 보이는 숙소에 들어가 밥을 먹고 잠을 잔다. 길 위에서 내 삶은 이 한 문장을 넘길 수가 없다. 나의 배낭에는 겉옷과 속옷 두 벌, 침낭, 세면도구, 수건 한 장, 판초, 경량 패딩, 일기장, 비상약, 여권과 돈 몇 푼밖에 없다. 살아가는 데 나에게 필요한 건 이 10킬로도 안 되는 가방 안에 모두 들어있다. 이 가방만 있으면 어디서든 살 수 있고 가고 싶은 곳에 얼마든지 갈 수 있다. 다만 내게 필요한 것은 걸을 수 있는 몸, 오로지 나에게 속한 그거 하나면 된다.

그렇다고 순례길에서 나의 몸이 멀쩡한 것은 아니다. 발가락 사이에 생긴 물집은 점점 세력을 넓히더니 단단하게 굳어 기이한 모양으로 변해가고 있었고, 무릎은 계단을 내려올 때마다 시큰거려 걸음걸음마다 긴장이 되었다. 순례길 위에서 고통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한다. 크든 작든, 다리든 어깨든, 걷는 동안 고통이 없던 날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더는 걸으면 안 될 상황이 아닌 이상, 내 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고통은 고통대로 그 자리에 있고, 나는 나대로 걷는다. 내 걸음은 내가 가진 고통과 무관하다. 그런 과정을 통해 내가 마지막으로 매여 있는 대상, 나의 몸에게 자유를 선포한다. 그 자유에 한계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내게 주어진 자유를 조금 더 넓혀볼 수는 있다.

길 위에서 나는 살아가는 동안 잊고 있었던 자유를 하나둘 발견한다. 세상 속에 짊어지고 있던 나를 정의하던 모든 것과 그로 인해 내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결국 배낭 하나로 남게 된다. 그간 소유해 왔던 많은 것들을 버리고 가장 근본적인 행위만 남겨 둔다. 먹고, 씻고, 자고, 걷는다. 뼈대만 남은 내 삶은 나를 정의하려고 애쓰던 시간보다 오히려 더 분명하다. 나라는 존재는 장소도 조건도 중요하지 않다. 어떠한 정의에도 의존하지 않는 나는 어느 때보다 능동적이다. 조각가가 돌 안에 숨겨진 조각상을 파내듯이, 내게 달려 있던 미사여구를 발자국 위에 하나둘 남겨두고 앞으로 나아간다. 나는 내 존재를 넓히는 것이 아니라 줄여나감으로써 나를 되찾는다. 더 이상 가진 것이 없을 때, 내게는 세상으로부터 필요한 것이 없고, 그러므로 나는 나로서 충만하다. 더는 두렵지 않다.

사람들이 때로 내게 물어왔다. 대체 왜 걷느냐고. 몸만 간신히 누일 수 있는 작고 냄새나는 숙소에서 묵으며 하루에 이삼십 킬로씩 걷는 고된 생활을 뭐가 좋다고 하냐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비가 오면 홀딱 젖어 비참한 모습으로 걷거나 남의 집 처마 밑에 숨어 비가 그치길 기다려야 했고, 빨래를 제대로 하지 못해 냄새나고 더러운 상태가 더 익숙했으니까. 그때마다 명확한 대답을 찾지 못한 나는 음식이나 문화 같은, 중요하긴 하지만 어찌 보면 부차적인 이유를 들어 대답하곤 했다. 하지만 내가 걷는 이유는 결국 하나다.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걸을 수 있기 때문에 걷고 이를 통해 내 존재는 또렷해진다. 걷는 것에는 다른 이유가 필요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 완전하다. 그러한 행위를 하는 나 또한 완전하다. 나는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걸을 것이고 걸을 수 없게 되면 걷지 못할 것이다.

걷는 나는 완벽하다. 지금 이 시각에도 길 위를 걷고 있는 자들에게 축복을.박엘리야 이름표.jpg0배너광고_대표_겨울.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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