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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사남'은 어떻게 1500만 관객을 울렸을까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단종·엄흥도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Apr 03 2026 12:01 PM


※이 칼럼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요즘 한국 영화계 최대의 화제작이 '왕과 사는 남자'라는 데는 아마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약간의 반골 기질이 있어서인지 나는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은 작품을 선뜻 보러 가는 편이 아니다. 하지만 영화가 1,000만 관객을 훌쩍 넘어 1,500만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대체 어떤 영화일까 하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극장을 찾았다. 단종의 폐위와 죽음이라는, 결말이 이미 스포된 것이나 다름없는 역사극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약진과 불황의 이중고로 비어 가던 영화관으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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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 폐위된 뒤 강원 영월의 산골 마을로 유배 간 단종 이홍위(박지훈). 쇼박스 제공

 

영화가 끝나고 벌게진 눈으로 극장을 나서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잘 만들어진 영화임이 분명했다. 타이틀롤을 맡은 유해진과 박지훈의 연기는 기대 이상이었고, 비극과 그 안에서 피어나는 따뜻한 휴머니즘, 그리고 유머가 적절히 뒤섞인 이야기의 흐름도 군더더기가 없었다. 하지만 호연이나 탄탄한 서사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이 영화에 있고,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정확히 건드렸기에 이토록 많은 눈물을 이끌어 낼 수 있지 않았을까. 정신과 의사로서, 이 영화만이 갖는 심리적 의미를 분석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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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왕과 사는 남자'. 쇼박스 제공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영화 초반 이홍위(단종·박지훈)는 수양대군이라는 거대한 권력에 의해 왕위에서 끌어내려지고, 자신을 지키려는 신하들이 수없이 죽어나가는 것을 목도해야 했다. 찾아와 겁박하는 한명회(유지태)에게 할 수 있는 말이라곤 "나는 이제 어디로 갑니까?"라는 힘없는 물음뿐이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더는 버틸 수 없다는 뿌리 깊은 절망감이 그의 마음속을 잠식하고, 결국 노산군으로 강등당해 유배를 가게 되자 마을 사람들이 애써 준비한 식사마저 거부한 채 방에 틀어박힌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학습된 무기력이라 부른다.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계속 실패로 돌아가다 보면, 사람은 시도 자체를 포기하게 되고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이홍위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그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격의 없는 순수함에 웃기도 하면서, 그의 마음속에는 아끼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능동적으로 행동하겠다는 의지가 자란다. 한명회가 "노산의 눈빛이 변했다, 그냥 둘 수 없다"고 경계할 만큼 이홍위는 수동적인 유배객에서 삶의 목적을 되찾은 주체적인 인간으로 조용히 거듭난다. 설사 실패할지라도 내가 옳다고 믿는 것들을 바로 세우기 위해 부딪혀 보겠다는 각오 덕에 그는 두려움을 이기고 역사를 다시 한번 바꾸려는 발걸음을 내디딘다.

모두가 알고 있듯 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홍위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존엄을 놓지 않는다. 세조가 내린 사약을 거부하고 엄흥도(유해진)의 손을 빌려 죽음을 맞이하고자 한 것이다. 자신의 죽음이 권력을 장악한 자들에 의해 강제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방식으로 치러지는 능동적인 의지의 산물이었음을 그는 입증하고 싶었을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빅터 프랭클은 의미치료(Logotherapy)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어도, 단 한 가지만은 결코 빼앗을 수 없다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할 자유가 그것이다. 이홍위의 마지막이 우리를 흔드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살았던 시대도, 머물렀던 공간도 다르지만 거대한 구조 속에서 나 혼자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만큼은 오늘날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극한의 상황에서 끝내 내 삶의 의미만큼은 스스로 정의하겠다는 이홍위의 선택은 우리 내면에 짙은 울림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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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엄흥도(유해진). 쇼박스 제공

 

교정적 정서 경험: 관계가 사람을 바꾼다

영화를 이끄는 한 축이 이홍위의 서사라면, 다른 하나의 축은 엄흥도라는 입체적인 인물의 존재일 것이다. 엄흥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대의명분만을 좇는 맹목적인 충신이 아니다. 오히려 지극히 현실적이고 이기적이며 인간적인 인물이다. 그가 청령포를 유배지로 유치하려 애쓴 것은 유배를 온 양반의 위세에 힘입어 굶주린 마을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글재주가 있는 아들을 한양으로 보내고자 하는 소망 때문이었다. 그런데 원하던 고관대작이 아닌, 끈 떨어진 갓이나 다름없는 이홍위가 유배를 오자 대놓고 원망을 한다. 한명회 앞에선 아들을 지키기 위해 누가 진짜 왕인지 잊고 있었다며 비루하게 머리를 조아리기도 한다. 그랬던 그가 마지막에 목숨을 걸고 이홍위의 시신을 수습하는 선택을 한다.

처음부터 고결하고 꼿꼿한 사람의 헌신은 아름답지만, 우리와는 먼 일처럼 느껴지기 쉽다. 하지만 그 일이 엄흥도처럼 조금은 나약하고 때로는 비겁해 보이기까지 하는 현실적인 인물이 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우리 스스로에게 '나라면 저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관객들이 엄흥도에게 이입하는 것은 단지 훌륭한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그가 우리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닮은 사람이 죽음을 무릅쓰고 옳은 선택을 했다는 사실이, 우리 안에도 그럴 수 있는 용기가 숨어 있다는 것을 조용히 일깨운다.

그렇다면 엄흥도는 어떻게 이런 변화를 맞이할 수 있었을까? 정신분석가 프란츠 알렉산더는 교정적 정서 경험(Corrective Emotional Experience)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사람은 새로운 관계 안에서 이전과 다른 정서적 경험을 반복할 때 삶과 타인을 대하는 근본적인 태도 자체가 바뀐다는 것이다. 거창한 깨달음이나 결심이 아니라, 관계 경험 그 자체가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이야기다. 엄흥도는 어느 날 갑자기 충신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 아니라, 이홍위의 소탈한 온기와 예상치 못한 진심을 곁에서 경험하면서 서서히 달라진 것이다. 이홍위 역시 마찬가지다. 감시자였던 엄흥도가 조금씩 자신의 편이 되어 가는 경험이 쌓이면서, 닫혀 있던 삶의 의지가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구원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한 시간 자체가 서로를 변화시켰다. 일방적이지 않았기에 그 관계가 더 특별하고 끈끈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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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왕과 사는 남자'. 쇼박스 제공

 

미뤄두었던 슬픔의 무게

프로이트는 상실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두 가지로 구분했다. 하나는 애도다. 무언가를 잃었을 때 그 슬픔을 충분히 느끼고,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다른 하나는 우울이다. 상실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슬퍼할 겨를 없이 억눌러 버릴 때, 그 감정이 내면에서 곪아 가는 상태다. 애도하지 못한 슬픔이 결국 자신을 향한 공격으로 돌아온다는 것이 핵심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슬퍼할 시간을 잘 허락하지 않는다. 잃어버린 것들(포기한 꿈, 좌절된 관계, 무너진 자존감) 앞에서 오래 머물기보다는 털고 일어나는 것이 미덕으로 통한다. 하지만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 어딘가에 고여 서서히 우리를 무겁게 만든다.

영화라는 장치는 가슴속에 고여 있던 이 감정들을 꺼내 놓아도 되는 안전한 공간을 마련해 준다. 우리는 이홍위의 비극을 보며 소년 왕이 겪었을 감정에 공감하고 눈물을 흘리지만, 그것은 동시에 그동안 제대로 슬퍼할 기회조차 없었던 나 자신의 수많은 상실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영화 말미, 목숨 걸고 이홍위의 시신을 수습하러 강으로 걸어 들어간 엄흥도가 시신을 안고 말한다. "차갑지요? 갑시다, 따뜻한 데로 갑시다." 이 대사에서 많은 관객이 무너진다. 시신에게 건네는 말이 구슬퍼서만이 아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힘들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산다. 약해 보일 것 같고, 누군가에게 짐이 될 것만 같아서다. 그렇게 꾹 눌러 두고 살다 보면, 정작 자신이 얼마나 고단했는지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엄흥도의 말은 그 지점을 건드린다. 힘들었지요, 추웠지요, 이제 같이 가요. 그 슬프고도 따뜻한 말이 나의 고단함을 누군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속 소망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우리 자신이 오랫동안 그 말을 기다려 왔기에, 눈물을 멈추기 어려웠던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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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단종 이홍위와 엄흥도. 쇼박스 제공

 

마음이 진짜로 원하는 것

요즘 부쩍 각자도생의 태도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느낌이다.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않는다. 동시에 누군가가 나에게 기대는 것도 싫다. 왕래는 꼭 필요한 것만 하고 각자 알아서 산다. 이런 태도는 쿨한 것으로 포장되지만, 정신의학적으로 보면 상처받지 않기 위해 먼저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는 방어다. 실제로 타인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고 말했다가 거절당하거나 실망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영화 후반부, 이홍위가 금성대군을 만나러 유배지를 탈출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챈 엄흥도가 관아로 발걸음을 향하는 장면이 있다. 신고하면 자신과 마을 사람들의 목숨은 안전하다. 이익으로만 따지면 답은 명확하다. 그런데 그는 신고하지 않고 돌아온다. 그리고 이홍위에게 묻는다. 저도 나으리가 아끼는 사람이냐고. 그러자 이홍위가 되묻는다. 너는 아니냐고.

이 짧은 대화에 영화의 전부가 담겨 있다. 엄흥도가 관아로 가는 발길을 돌린 것은 충성심 때문도, 대의명분 때문도 아니다. 그냥 이홍위라는 존재가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생존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선택을 서로를 위해 기꺼이 내릴 수 있는 관계. 이익을 따지지 않아도 되는 관계, 그냥 존재만으로 서로에게 선택이 돼 주는 관계.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더라도 무엇에 마음이 열리는지까지는 숨길 수 없다. 영화를 본 수많은 우리의 마음속 감정의 둑이 터져 버린 것은, 누군가와 서로 기대어 온기를 나누고 싶다는 감각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1,5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같은 온도로 반응했다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사람도 같은 마음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먼저 손을 내밀어 보자. 동시에 누군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지는 않은지, 주변을 살펴보자. 나를 변화시킬 특별한 관계의 씨앗이 자신을 품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오동훈 연세온정신건강의학과의원 대표원장

 

www.koreatimes.net/오피니언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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