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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존엄사를 선택한다면
당신은 찬성할 수 있나요?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Apr 12 2026 02:20 PM
내 죽음은 나의 것이라 믿었지만 엄마의 존엄사 겪고 생각 바뀌어 죽음 후 슬픔은 남은 가족의 몫
지난 2월 9일 존엄사를 목적으로 스위스로 향하려던 60대 남성이 비행기에 탑승한 뒤 마음을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는 기사를 읽었다.

삽화=신동준 기자
유서인 듯한 편지를 본 가족이 경찰(112)에 신고했고, 공항으로 출동한 경찰이 그를 설득했다는 내용이었다. 남성은 폐섬유증 환자였다고 한다. 폐가 굳어 숨이 모자라고, 질식에 가까운 공포가 지속되는 병이다. 그와 가족들에게 어떤 사정이 있었을지, 제3자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기사를 통해 추론해 보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
우선 가족은 환자의 선택을 찬성하지 않았다. 폐섬유증 환자, 60대 남성은 스스로 죽음을 예약했으나 취소해야 했다. 본인의 고통을 끊고자 하는 절박함과 그것을 만류하는 가족들의 간절함이 상충됐던 것이다.
나는 존엄사가 '자기결정권'의 문제라고 믿어 왔다. 나의 삶이 나의 것이듯, 나의 죽음도 나의 것이라고. 그런데 정말 그럴까. 엄마를 보내고 나서야 그리 단언할 수만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엄마의 존엄사 과정을 담은 에세이를 읽은 분들이 내게 다가와 하는 말이 있다. "저는 언젠가 저의 때가 오면 작가님 어머니 같은 선택을 하고 싶어요. 그렇지만 내 어머니가 존엄사를 하겠다고 한다면 작가님처럼 도울 자신은 없어요."
자신은 떠날 수 있지만,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낼 수는 없는 마음. 이것이 가족 관계의 역설이다. 작년 2월 보건사회연구원에서는 한국 성인 10명 중 8명이 '조력 존엄사'의 합법화에 찬성한다는 설문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질문을 바꾸면 어떨까. "당신의 가족이 존엄사를 선택한다면 찬성하시겠습니까?" 결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엄마가 떠난 뒤 2년 반이 흘렀다. 그동안 나처럼 스위스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보낸 이들을 몇분 만났다. 루게릭, 폐암 말기 등 존엄사를 선택한 이유는 달랐지만 그 공통점은 하나다. 선택의 중심에는 언제나 고통이 있었다. 현대 의학으로는 치유 불가능한, 독한 진통제로도 잦아들지 않는 통증. 일상을 파괴하는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 지속되는 상황이었다.
아빠는 그 고통의 목격자였다. 24시간 엄마 곁을 지키며, 자다가도 비명을 지르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고스란히 바라봤다. 그래서 엄마의 결심을 찬성하지 않았지만, 반대할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반대하는 것은 고통의 시간을 더 늘이라는 의미와 마찬가지였으므로.
나는 고통의 공감자였다. 죽음보다 더한 통증에 시달리던 엄마가 자살까지 상상한다는 걸 목격하고 알았기에 엄마의 선택을 지지했다. 그렇게 아빠와 나는 엄마와 함께 스위스에 갔다. 셋이 갔다가 둘이 돌아와야 하는 운명임을 알면서.
그러나 모든 가족이 찬성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빠는 엄마의 결정에 대해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그냥 "알아서 하세요"라고 했다. 스위스 동행도 하지 않았다. 두 이모들은 반대했다. 둘째 이모는 끝내 엄마의 마지막 연락을 받지 않았다. 셋째 이모는 "1, 2년은 더 살 수 있는데 왜 그런 결정을 했냐"며 원망의 말을 했다.
외삼촌과 막내 이모만 작별 인사 하러 집에 왔다. 당시에는 오지 않는 사람들에게 분노했는데 이제는 이해한다. 가까이서 고통을 본 사람과, 멀리서 사랑만 기억한 사람의 차이였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고통을 지켜보는 거리가 판단의 기준이 되었던 것이다.
나와 같은 경험을 한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가족 중에 한 사람만 동행했거나, 어떤 이는 친지들에게 알릴 수 없어 가족 묘지에 비석을 세우지도 못했다고 한다.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엄마를 떠나보내고 나서 스위스 조력 사망 기관인 디그니타스의 담당자 카린과 소통을 하고 지낸다. 그를 통해 다양한 국가에서 죽음의 자기결정이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가족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전해 듣는다. 최근에는 혼자 온 영국인이 존엄사로 떠난 뒤 가족이 소송한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본인들의 동의 없이 진행했다는 이유였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존엄사는 당사자의 의지로 이뤄지지만 가족의 삶에 깊고 긴 파장을 남긴다. 나의 죽음이 온전히 나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사랑하는 이들의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아직도 묻는다. 엄마의 마지막 여정을 더 편안하게 해드릴 방법은 없었을까. 어째서 위로의 말을 충분히 건네지 못했을까.
스위스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 아빠와 나 둘만 남은 자리에는 엄마의 온기 대신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죽음은 개인의 것이지만 슬픔은 가족의 것이다.
남유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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