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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몸살: 삶의 오르막에서 만난 위로
이남수(문협회원)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Apr 09 2026 12:23 PM
수필이 있는 뜨락(32)
점심을 먹고 동네 산책을 나섰다. 오늘은 흐린 하늘 아래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나무들이 ‘바람 몸살'을 앓고 있었다. 발코니 너머 늘씬한 단풍나무는 유연하게 이리저리 흔들리고, 뿌리 깊은 소나무는 든든하게 자리를 지킨다. 아카시아 역시 거친 바람 속에서도 뽑히지 않고 나름의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모습들을 보며, 나는 문득 젊은 날 온몸으로 맞섰던 수많은 바람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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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모슬포는 '바람'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바람이 너무 심해 "못 살겠다, 못 살겠다" 하다가 '모슬포'가 되었다는 원주민들의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다. 제주의 바닷바람은 소금기 탓인지 몸을 묵직하게 억눌렀지만, 온타리오 호수의 민물 바람은 막힌 속을 시원하게 뚫어주었다.
내 인생의 가장 선명한 기억은 산에서 만난 바람이다. 대학교 2학년 춘계 산행, 지리산 능선에서 마주한 바람은 젊은 날의 복잡다단한 사념을 단번에 날려버릴 만큼 상쾌하고 강렬했다. 나는 그 바람에 매료되어 우리 강산을 훑고 다녔다. 어깨를 짓누르는 30kg의 배낭을 메고 며칠씩 산을 타는 고단함은 역설적으로 나의 구원이었다. 시대적 불안과 불확실한 미래로 요동치던 청춘의 고뇌를 하산길에 미련 없이 내려놓게 해주는, 나를 살리는 유일한 탈출구였으니까.
그중에서도 겨울 설악의 바람은 차원이 달랐다. 살을 에는 칼바람이 고독한 영혼의 울음소리처럼 귓가를 휘감던 죽음의 계곡 초입, 나는 숨을 죽이며 올랐다. 1970년대, 히말라야 원정을 준비하다가 눈사태로 잠든 대원들의 묘비를 뒤로하고 빙판 계곡 길에 들어섰다. 발끝의 12발 아이젠에 온 신경을 집중한 채, 우리 네 명은 오직 자일(등반자가 몸에 묶는 안전용 밧줄)하나에 서로의 생명을 걸고 위태롭지만 단단한 걸음을 옮겼다. 한순간 중심을 잃고 넘어진 동료와 함께 허공으로 붕 떠올랐던 아찔한 찰나, 모든 감각은 오직 '생존'에만 집중되었다. 그 음산한 바람을 뚫고 마주한 동해의 푸른 바다는 파란 하늘과 맞닿아 장엄한 풍경... 그 순간 터져 나온 환성은 죽음의 그늘을 일시에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그때 겨울 설악은 내게 고고하면서도 강인한 여장부의 기상으로 다가왔고, 나는 그렇게 설악과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여름 설악의 바람은 또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4학년 여름,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머리가 무거워질 때쯤 후배들의 장기 산행에 동행했다. 공룡능선을 주파하고 서북 주 능선을 걷는 일정이었다. 뺨을 후려치는 매서운 바람 탓에 이름 붙여진 '귀때기청봉(귀청)을 지나 1,275봉 근처에서 야영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비에 신입생들의 체력이 바닥나 버렸다. 너덜겅 지대(바위가 무너져 내린 비탈 지역)를 지나던 순간, 나는 비로소 지친 대장과 후배들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자칫 조난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귓가를 스치는 여름 설악의 바람은 차갑고 스산한 경고처럼 들렸다. 다행히 바람이 잦아든 사면에 천막을 치고 빵과 따뜻한 율무차를 나누어 마신 뒤,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그곳을 빠져나와 무사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스위스의 한 등산가는 그의 저서에서 '흰 산'과 '푸른 산'을 노래했다. 인생에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듯, 산의 바람 또한 양면의 얼굴을 지닌다. 때로는 흰 산의 준엄한 침묵처럼 매섭고, 때로는 푸른 산의 넉넉한 품처럼 따스하다. 자연을 '어진 것' 혹은 '어질지 않은 것'으로 보았던 옛 성현들의 시선도 결국 이 바람의 양면성을 말하려던 것이 아닐까. 이 상반된 시선은 겨울의 칼바람과 여름의 생생한 숨결처럼, 결국 우리 삶의 굴곡을 그대로 닮았다. 나이가 들며 강한 비바람과 서늘한 미풍을 두루 겪다 보니, 이제는 대나무처럼 맞서다 부러지기보다 풀잎처럼 눕는 유연함을 조금이나마 배운 듯하다. 이제는 내게 불어오는 바람들을 순하게 받아들이며 그 순간에 집중하고 싶다.
언젠가 한 지인이 내게 물었다.
"어차피 내려올 텐데 왜 힘들게 산에 오릅니까?"
나는 이렇게 되물었다.
"어차피 죽을 걸 알면서 왜 사십니까?"
어리석은 질문이었을지 모른다. 우리 삶의 완결은 결국 죽음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마음이 고독하거든 숲으로 가라"던 철학자의 말처럼, 인생의 진정한 치유는 자연 속에서 비로소 완성되는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바람을 맞으며 묵묵히 걸어온 나 자신과 저마다의 바람을 견디고 있는 모든 삶에 힘찬 박수를 보낸다.
햇살 조각이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집 앞 숲길을 걸을 때, 나는 이제 나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시원한 미풍을 마주한다. 숲에 들어서면 가슴이 열리고 호흡은 여유로워진다. '나 여기 있어요'라고 손짓하는 아기 고사리 닮은 야생화에 눈을 맞추며 사진 한 장을 남긴다. 그 사이로 스치는 바람에 단풍나무잎들이 '두런두런, 스삭스삭' 속삭인다. 서로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궁금해 가만히 귀를 열어본다. 마치 그동안 정신없이 사느라 고생 많았다고, 이제는 좀 내려놓고 쉬어도 된다고 바람이 내 등을 토닥여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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