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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 고립된 그레이스 박사, ‘공감·유대’의 힘으로 정체성 되찾아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그레이스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Apr 19 2026 10:29 AM


진료실에서는 오랜 연인과 이별했거나 평생 몸담았던 직장에서 은퇴한 뒤 깊은 우울과 혼란에 빠진 분들을 자주 만난다. "선생님, 그 사람이 사라지니까 제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텅 빈 껍데기만 남은 것 같아요."

우리는 종종 '나'라는 존재가 내 안에 온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지만, 사실 우리는 누군가의 동료, 연인, 가족이라는 타인과의 관계망 속에서 나를 확인하며 살아간다. 나를 비춰주던 관계들이 한순간에 사라질 때, 우리는 고립감과 함께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공포에 빠지게 된다. 인간은 스스로의 인생을 타인과 얽힌 하나의 이야기로 인식하며 살아가기에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은 곧 내 존재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상실이다.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보면서 진료실에서 마주했던 이 '관계의 상실'과 정체성의 혼란,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게 만드는 유대의 힘에 대해 한참 생각하게 됐다.
 


벽 너머에서 시작된 연결
 

ca58f1ca-25e3-4f7f-a394-0229e1353e7d.jpg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주인공 그레이스(라이언 고슬링) 박사. 소니 픽처스 제공

 

주인공 그레이스(라이언 고슬링) 박사가 아득한 우주에서 눈을 떴을 때 마주한 공포 역시 단순한 기억 상실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비춰줄 타인도, 내가 속했던 세계도 모두 사라진 절대적인 고립이었다. 긴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왜 이 차갑고 거대한 우주 한가운데에 홀로 남겨져 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곁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두 동료의 시신만이 놓여 있을 뿐이다.

그런데 백지상태가 된 그레이스가 '나'라는 존재를 더듬어가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그는 세상을 떠난 동료들인 야오 선장과 엔지니어 일류키나의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들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관찰하고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상상하며, 자신 역시 그들과 함께 훈련을 받고 임무를 수행했던 '어떤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기억을 조금씩 되찾아간다. 나라는 정체성은 내가 홀로 정의하는 것뿐만 아니라, 타인과 맺었던 관계와 흔적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지구의 모든 관계가 끊어진 고립 속에 그레이스는 낯선 외계 존재 '로키'와 조우한다. 둘 사이에는 서로의 생명을 즉각적으로 위협하는 대기 환경의 차이가 있었고, 결코 허물 수 없는 투명하고 단단한 벽이 존재했다. 그런데 이 벽은 역설적으로 두 존재가 서로에게만 집중하게 만드는 유일한 통로가 된다.

 

3b38fb90-9853-482b-b0a4-7b572297b70a.jpg그레이스가 로키에게 지구 모양의 뜨개 주머니를 건네는 장면. 소니 픽처스 제공

 

흥미로운 점은 그레이스와 로키가 서로를 인식하고 다가가는 방식이다. 그레이스는 행동을 보여주고 로키는 그 움직임을 똑같이 따라 한다. (엄지척은 비록 반대로 했지만 말이다.) 이후 그들은 벽에 다가가 일정한 리듬으로 소리를 내고 두드리기 시작한다. 이것은 단순히 '저기 살아 움직이는 것이 있다'는 확인 단계를 넘어선다. 나의 신호에 반응하고 내 리듬에 공명하는 존재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내 몸짓이 벽을 넘어 상대에게 닿고, 그것이 똑같은 모습으로 되돌아올 때 인간은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을 넘어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존재라는 연결감을 느낀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정서적 동조(attunement)라고 부른다. 우리 뇌의 거울신경세포(mirror neuron)를 비롯한 공감 신경망이 작동해 상대의 행동과 의도를 마치 내 것처럼 시뮬레이션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이 원초적인 공감의 몸짓은 흥미로운 결과로 이어진다. 상대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안전하다는 신호다. 내 동작을 따라 하는 존재는 '나와 비슷한 규칙으로 움직이는 대상'으로 인식되고, 뇌는 예측 가능한 존재를 위협이 아닌 협력 가능한 대상으로 분류한다. 그레이스는 생김새도 언어도 전혀 다른 미지의 존재 앞에서,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치명적인 상황을 무릅쓰고 자신의 우주복 헬멧을 벗는다. 상대를 완벽히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헬멧을 벗고 더 깊은 소통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은 벽 너머로 주고받았던 동조와 공감의 경험 때문이 아니었을까.
 


도망치던 나를 바꾸는 관계
 

8bf65189-e706-44e2-848a-18d709d7d180.jpg'프로젝트 헤일메리'에 참여하기 전 중학교 과학 교사로 살아가던 그레이스 박사. 소니 픽처스 제공

 

그런데 로키와 함께 인류를 구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조각난 기억이 하나둘 돌아올수록, 그레이스는 외면하고 싶었던 자신의 진짜 모습과 대면하게 된다. 서서히 윤곽을 드러낸 과거의 그는 대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영웅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학계의 비난과 조롱을 받자 맞서 싸우는 대신 중학교 과학 교사로 조용히 숨어버렸던 사람. 처음 임무를 제안받았을 때도 자신은 영웅이 될 자격이 없다며 움츠러들었던 평범하고 두려움 많은 사람이었음을 기억해 낸 것이다.

진료실에서도 자신의 이런 '회피' 성향을 부끄러워하며 스스로를 자책하는 분들을 자주 만난다. "저는 문제가 생기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도망부터 쳐요. 남들은 다 잘 이겨내는데, 저만 나약하고 비겁한 것 같아서 제 자신이 싫어요."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위협이나 고통 앞에서 한 발 물러서는 회피는, 상처받기 쉬운 마음이 부서지지 않도록 보호하려는 무의식적인 생존 전략이다. 누군가는 부딪혀 이겨내라고 쉽게 조언하지만, 내면의 자원이 고갈된 상태에서는 일단 피하는 것이 오히려 건강한 선택일 수 있다. 회피가 우리를 정말로 괴롭히는 이유는 물러서는 행동 그 자체보다, '도망친 나'를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고 비난하는 마음에 있다. 수치심이 깊게 뿌리내리면 나라는 존재 전체를 부정하게 만들고,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우리를 다시 고립으로 밀어 넣는다.

과거의 자신이 영웅이 아니었으며 두려움에 도망치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레이스는 다시 예전처럼 숨어버렸을까. 그렇지 않았다. 무너져 내릴 뻔한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뇌 속에 저장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 곁에서 자신을 온전히 믿고 의지해 주는 로키와의 단단한 유대였다. 기억 속의 그는 숨기 바빴던 겁쟁이였을지 몰라도 지금 로키의 곁에 선 그는 기꺼이 상대를 돕고 위기를 함께 헤쳐나가는 하나뿐인 파트너였다. 누군가를 향한 깊은 마음이 우리를 '더 이상 뒤에 숨어 있을 수 없게' 만들 때, 두려움에 떨던 도망자는 비로소 진정한 용기를 피워낸다.
 


나를 지키는 유대의 힘
 

d9d39796-cf5a-4259-93fa-1d2f6b042ba6.jpg우주선 안에서 그레이스와 로키가 서로 등을 맞대고 교감하는 모습. 소니 픽처스 제공

 

물론 타인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고 연결되는 이 능력은 때로 무거운 마음의 짐이 되기도 한다. 진료실에서도 타인의 감정에 너무 깊이 동조한 나머지 오히려 스스로를 갉아먹고 힘들어하는 이들을 자주 만난다. 상대의 고통이 생생히 느껴져서 정작 돌봐야 할 내 고통을 뒤로 미루는 사람들이다. "이 관계가 저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사람이 힘들어하는 걸 보면 차마 돌아서질 못하겠어요. 제가 너무 약해서 그런 걸까요?"

이들에게 단순히 '당신을 위해 당장 끊어내라'고 조언하는 것은 쉽지만,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이 가진 공감의 힘까지 모두 부정하게 될 우려가 있다. 떠나지 못하는 것이 멘털이 약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타인의 감정을 내 것처럼 깊이 느끼는 능력이 뛰어나서 생긴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아픔을 예민하게 감각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관계 안에서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쉽게 지치기 마련이다. 하지만 타인을 향한 그 공감이야말로, 그레이스가 우주 한가운데서 자신의 취약함을 노출하며 헬멧을 벗고 혼자서는 어려웠던 용기를 낼 수 있게 만든 힘이었다.

우리는 살아가며 문득 내가 누구인지 확신이 서지 않거나, 지나온 삶이 초라해 보일 때가 있다. 나를 비춰주던 관계가 끊어져 세상에 나 혼자만 남겨진 것 같은 두려움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나를 정의하는 것은 나와 내 기억이 전부는 아니다. 지금 내가 누군가에게 내미는 손길, 그리고 그 신호에 응답하는 존재들과의 연결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다시 나를 찾아간다. 타인의 감정에 깊이 공감하느라 스스로가 버겁다면, 차마 모진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자신이 약하게 느껴진다면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어도 좋다.

진료실에서 관계의 단절로 삶의 허무함을 호소하고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며 불안해하던 분들에게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그레이스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기억을 잃고 홀로 깨어난 그레이스가 자신을 되찾은 방식은 혼자 내면을 파헤치는 것뿐 아니라 동료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낯선 존재와 벽을 두드리며 다시 관계를 쌓아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레이스가 로키를 도왔고, 로키도 그레이스를 도왔다. 서로가 서로의 문제를 풀어주고, 서로가 서로에게 용기의 이유가 되었다. 당장은 나를 비춰줄 거울을 잃어버려 괴로울 수 있다. 그런데 누군가와 신호를 주고받고 서로를 도왔던 경험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유대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한 우리는 다시 내가 누구인지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허규형 연세가산숲정신건강의학과의원 대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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