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핫뉴스
4.19혁명 범교민적 기념, 왜 매년 실종되는가
한국 민주화의 시발점...186명 희생
- 김명규 발행인 (publisher@koreatimes.net)
- Apr 20 2026 03:39 PM
집권자에겐 국민저항권 부각이 불쾌한가
4.19 혁명 기념은 올해도 침묵했다. 국가기념일임에도 불구하고 선뜻 기념하는 이가 드물다. 한국민주화 운동의 첫 걸음에 나섰다가 유명을 달리한 186명의 영령을 위로하고 유가족을 보듬는 행사는 토론토에선 실종된 지 오래다.
토론토한인회도, 토론토총영사관도, 어떤 단체도 이날을 '범교민적으로' 기념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1960년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 열사의 시신.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사망한 그의 참혹한 모습은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부산일보 자료사진
토론토총영사관 관계자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4.19 기념행사에 대해선 매년 특별한 정부 지시가 없었다”고 전했다.
지금 한국이 누리는 민주주의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4.19 의거를 시작으로 이어진 민주화운동 속에서 피흘린 애국시민이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했던 결실이다.

김주열 열사(나무위키 사진)

4.19 혁명 당시 고교 시위대가 경무대(대통령 관저:지금의 청와대)로 향하고 있다. 나무위키 사진
1960년, 한국전쟁이 끝난 지 7년째였으나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는 부패로 얼룩져 있었다. 궁핍한 민생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사이 빈부격차는 심화되었으며 이승만 정권의 영구 집권 야욕은 노골화되었다. 대통령 주변의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그의 하야를 결사적으로 막아 세웠다.
참다못한 국민과 야당을 중심으로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가 등장하자, 집권 세력은 “갈아봤자 별수 없다, 구관이 명관이”이라고 맞받아쳤다. 이는 기지가 빛나는 구호였을지 모르나, 역설적으로 집권자 스스로 사태의 심각성을 인정한 꼴이 되었다.
4.19 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한국 현대사 최악의 부정선거인 ‘3.15 부정선거’였다. 당시 84세였던 이승만은 무투표 당선 수준이었고, 이기붕 부통령 후보는 79%, 이 대통령 지지율은 89%라는 비현실적인 수치를 기록했다. 실소를 자아낼 만큼 황당한 지지율이었다. 이 결과를 위해 자유당은 경찰을 동원해 투표 시작 전 40% 사전 득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 조직적이고 전방위적인 부정을 저질렀다.
이에 대학생들이 용기 있게 일어섰고 고교생과 시민들이 합류했으며, 나중에는 대학교수단과 군까지 지원에 나섰다. 경찰의 무차별 발포 등 강경 진압으로 대규모 희생자가 발생했다. 전국적으로 사망자 186명, 부상자 6,259명이었다.
그 중심에는 김주열 열사가 있었다. 1944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마산상고 입학시험을 치렀던 열사는 3월15일 시위 중 실종되었다. 실종 27일 만인 4월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그의 시신은 국민적 분노를 폭발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당시 시위 진압 후 시신을 발견한 경찰이 이를 차에 실어 바다에 유기했다는 사실은 세상을 더욱 경악케 했다.
결국 4월26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후 하와이로 망명했다. 이기붕 부통령 당선인 일가는 장남 이강석이 가족을 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집단 자살설 등 이견이 있으나 비극적 종말임은 분명하다). 이로써 제1공화국은 막을 내렸지만, 4.19 혁명이 남긴 민주주의의 가치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내년부터라도 이곳 캐나다에서 4.19 혁명을 제대로 기념하는 대규모 행사가 열리기를 바란다. 그것이 희생자들의 영령을 위로하고 고국의 민주화 정신에 동참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www.koreatimes.net/핫뉴스
김명규 발행인 (publisher@koreatimes.net)
전체 댓글
Brendon ( jpa**@newsver.com )
Apr, 20, 06:19 PM Reply왜 갑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