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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이념보다 ‘가스·우유값’이 더 중요”

인도 선거판 뒤흔든 ‘여성 유권자’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Apr 25 2026 01:50 PM

정치 문법 바뀌는 인도 2년 총선서 여성 투표율 65.8% 남성 추월 저소득층 겨냥한 ‘현금성 지원’ 제도 도입 위생·화장실·연료 등 ‘여성 맞춤 복지’ 주효


4월 초 인도 서벵골주 콜카타 외곽 지방선거 유세 현장. 뜨거운 공기를 가르며 ‘여성 유세단’이 선거판의 선봉에 섰다. 이들은 트리나물회의당(TMC) 소속 마마타 바네르지 현직 주지사 지지를 호소했다. ‘여성 인권 최악의 도시’라는 오명이 붙은 인도에서 여성이 선거의 중심에 선 낯선 풍경이다. 서벵골주는 오는 23일 지방선거를 치른다.

여성 유세단은 바네르지 주지사의 대표 복지 정책인 ‘락슈미르 반다르’(여신의 창고)를 홍보하는 손팻말을 흔들며 표를 호소했다. 이 정책은 서벵골주 저소득층 여성 2,100만 명의 통장에 매달 1,500~1,700루피(약 2만3,700~2만6,800원)를 이체해 주는 ‘현금 지원’ 제도다. 여성 유권자 슈프리야 고시(37)는 ‘주정부에 더 바라는 것이 있느냐’는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의 질문에 “더 많은 지원”이라고 웃으며 답했다.

 


인도 여성 '킹메이커'로 등장
 

1e4650e8-2f95-452a-89c7-a5baa8736e18.jpg인도 여성이 9일 아삼주 지방선거에 투표한 뒤 손가락을 들어 보이고 있다. 아삼=AP 연합뉴스

 

인도 정치의 문법이 바뀌고 있다. 2024년 총선에서 여성 투표율은 65.8%를 기록해 처음으로 남성을 앞질렀다. ‘킹메이커’로 부상한 여성 표심을 잡기 위해 정당들은 앞다퉈 맞춤형 정책 경쟁에 나섰다. 그러나 정책 경쟁이 즉각적 현금 지원에 쏠리면서 여성의 실질적 권리 확대보다 단기적 표심 확보에 집중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성 유권자는 후보 선택 기준부터 남성과 확연히 달랐다. 한 조사에 따르면 후보 선택 기준으로 ‘정치적 이념’을 꼽은 여성은 10%도 되지 않았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전했다. 이 매체는 “힌두교 수호, 이슬람계 이민자 유입 등과 같은 이슈는 남성 유권자를 자극할지 몰라도 여성에게는 통하지 않았다”고 했다.

여심은 ‘손에 잡히는 정책’에 움직이는 것으로 조사됐다. 인도국립은행(SBI)이 지난해 1월 발표한 총선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총선에 참여한 여성 투표자는 2019년 대비 1,800만 명 증가했다. 이들을 투표장으로 이끈 요인으로는 문해력 향상(450만 명) 고용·금융지원(360만 명) 주거 소유(200만 명) 위생·화장실 지원(210만 명) 등으로 분석됐다.

특히 2019년 이후 ‘여성 맞춤 복지’를 시행했던 19개 주에서 여성 투표 규모가 평균 78만 명이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정책이 없던 주는 25만 명이 느는 데 그쳤다. 인도국립은행은 보고서에서 “여성의 투표율 상승은 현금 지원을 포함한 여성 맞춤 복지 정책의 결과”라고 했다.

원로 여성 저널리스트 루히 테와리는 여성 유권자를 분석한 책 '여성이 원하는 것(What Woman Want)'에서 “남성 중심 사회에서 매일 생존을 고민해온 여성들은 남성보다 훨씬 선명한 생존 본능을 갖고 있다”며 “힌두 민족주의나 카슈미르 분쟁 같은 '문화 전쟁' 혹은 '거대 이념'보다는, 당장 내 부엌의 가스통 값과 아이들의 우유 값을 해결해주는 구체적 복지 공약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했다.
 


주요 정당 '여심 잡아라' 경쟁
 

c1472d80-13b9-4620-b20c-41054ccdabc4.jpg3월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 한 가스 대리점 앞에서 시민들이 빈 액화석유가스(LPG) 통을 채우기 위해 줄을 선 모습. 중동 분쟁 격화로 걸프만발 선적이 막히면서 인도 전역에서 LPG 공급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우타르프라데시=EPA 연합뉴스

 

인도 정치권도 이 같은 지점을 파고들었다. ‘여성 유권자’의 파워를 처음 간파한 정당은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이끄는 집권 인도국민당(BJP)이다. 인도국민당은 2014년 총선에서 여성을 위한 취사용 연료 지급, 여성 경찰 확충, 여성 교육 강화를 약속하며 여심 공략에 집중했다. 그 결과 전체 543석 중 282석을 확보하는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이후 인도국민당은 여성 공략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2016년 저소득 가정 여성에게 취사용 LPG 보조금을 지원하는 ‘우즈왈라 요자나’(빛나는 정책)를 시행해 전체 여성 유권자 45%가 혜택을 받았다. 출산휴가는 기존 12주에서 26주로 연장했고, 학교 내 여성 화장실 설치도 추진했다. 2023년에는 의회 의석의 33%를 여성에게 강제 할당하는 ‘나리 샤크티 반단 법안’을 통과시켰다. 다만 적용 시점은 인도 인구총조사가 완료되는 2027년 이후로 미뤘다.

여성용 현금 복지제도는 인도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했다. 현재 28개 주 가운데 16개 주가 여성용 현금 복지제도를 운영 중인데, 2022년만 해도 2개 주에 불과했다. 바나티 스리니바산 인도국민당 여성위원장은 싱가포르 CNA방송 인터뷰에서 “인도국민당이 집권한 후 모든 정당이 여성 유권자의 표심을 얻기 위해 노력하게 됐다”고 했다.

현금 복지제도는 여성의 기본적 인권을 향상하고 가정 경제를 떠받치는 수단으로 자리매김했다. 인도 재무부의 올해 1월 경제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이 제도는 여성 일용직 노동자 월소득의 11~24%, 농촌 여성 월간 소비의 40~50%를 차지했다. 비영리재단 프라티치 트러스트 조사에서는 여성의 60%가 ‘현금 지원 정책이 가정 내 여성의 위상을 높인다’고 응답했다. 87%는 ‘여성의 취업·창업에 도움을 준다’고 밝혔다.

테와리는 “정치권이 여성을 현금으로 지원하는 건 순전히 선거용 계산”이라면서도 “정치권이 여성에게 직접 말을 건네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큰 변화”라고 했다. 그는 “여성들은 현금 복지제도를 공짜나 뇌물이라고 생각하기보다 삶의 공백과 수준을 높여주는 수단이라고 여긴다”고 했다.
 


선거 결과 흔들고 재정 부담까지
 

8dbb17ae-c185-4dd5-9f2f-39e6756edf6f.jpg2024년 4월 인도 서벵골주 쿠치베하르 딘하타 지구 칼라마티 마을의 한 투표소에서 투표를 위해 여성들이 줄을 서고 있다. 서벵골=AFP 연합뉴스

 

물론 현금 복지제도의 한계도 적지 않다. 우선 여성 정책이 ‘매표용 정책’으로 고착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타밀나두주 집권당인 드라비다 무네트라 카자감(DMK)은 이번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성에게 가정용 전자제품 구매에 쓸 수 있는 8,000루피 상당의 쿠폰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인도국민당은 케랄라주 선거에서 현재 월 2,000루피(약 3만1,600원)인 여성 사회복지연금을 3,000루피(약 4만7,400원)로 인상하겠다고 공약했다.

선거 결과도 현금 복지가 좌우하는 분위기다. 국민민주연합(NDA)은 지난해 11월 비하르주 선거 직전 ‘생계 지원’ 명목으로 여성 750만 명에게 1만 루피(약 15만8,000원)를 입금했고, 243석 중 202석을 쓸어 담았다. 2023년 마디아프라데시 주의회 선거에서 인도국민당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배경으로도 여성에게 1,000루피(약 1만5,800원)를 지급하는 '라달리 베나’(소중한 자매) 제도의 인기가 꼽힌다.

재정 부담도 커지고 있다. 재무부 경제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인도 주정부들이 여성 현금 복지에 쏟아붓는 예산은 연간 1조7,000억 루피(약 26조8,700억 원)에 달한다. 이 제도를 운영하는 16개 주 가운데 절반(8개 주)은 재정 적자 상태다. 이코노미스트는 “재정지출이 방만한 서벵골주의 주정부 부채는 지역총생산(GSDP) 대비 38%로 역대 최고치”라며 “락슈미르 반다르 정책만으로도 주 세입의 10%를 소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금 지원 정책이 여성 삶의 장기적 개선에 필요한 정책을 밀어내고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주 정부가 현금 복지에 쓰는 예산이 교육·보건 인프라 신규투자 예산과 맞먹는 수준이다. 인도 공산당 소속 딥시타 다르 서벵골주의원 후보는 이코노미스트에 “정치인이 바뀌면 언제든 사라질 선물이 아니라 임금을 높이고 노동 환경을 개선해 여성 생활 수준을 높이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여성 주목은 의의, 해결 과제 여전히 많아"
 

87e6e8b1-04d5-4aac-9f39-89d609a632d1.jpg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20일 이재명 대통령의 인도 방문에 앞서 기다리는 모습이다. 뉴델리=AP뉴시스

 

실제 여성에 대한 정치적 관심과 달리 사회 전반적 여성 입지는 처참하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지난해 펴낸 글로벌 성평등 보고서에 따르면 인도는 148개국 가운데 131위를 기록했다. 여성의 경제 참여 기회 부문은 144위였다. 2023년 기준 인도 여성의 노동 참여율은 32%로 베트남(70%)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2023년 기준 여성 대상 범죄는 45만 건으로 전년 대비 약 0.7% 증가했다. 남편·친족에 의한 학대가 13만3,000건(29.8%), 납치 및 유괴가 8만8,000건(20%)으로 1위, 2위를 차지했다.

정치권에서 여성의 영향력도 미미한 수준이다. 현재 인도 국회에서 여성 의원 비중은 15.1%로, 투표율(65.8%)과 격차가 크다. 정당들이 여성 표를 탐내면서 권력을 나눠주지는 않고 있다는 얘기다. 테와리는 카트만두포스트 칼럼에서 “여성을 둘러싼 정치적 대화와 정책은 여전히 남성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며 “선거를 거듭할수록 정당들이 여성 유권자에 주목하고 있지만, 해결할 과제는 여전히 많다”고 했다.

현금 지원 정책의 단기적 효과는 분명하지만, 여성의 장기적 권리 향상을 위한 정책과의 균형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인도 재무부는 경제조사보고서에서 “현금 지원이 여성의 즉각적인 소득을 보전하고 개인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면서도 “고용 확대, 기술 교육 등 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 없이 현금 복지만 급격히 늘리는 방식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경고했다.


하노이=정지용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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