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기획기사
‘사랑의 모양’이 궁금하다면
당신 눈 속 ‘편견의 가시’를 뽑아요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May 18 2026 12:04 PM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의 엘라이자
얼마 전 발달장애인들의 생애 첫 소개팅을 다룬 프로그램 '몽글 상담소'를 봤다. 소개팅을 앞두고 기대에 찬 출연자들의 모습은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여운이 가시지 않아 관련된 영상을 찾아보던 중 마음속에 쿡 박히는 댓글 하나를 봤다. "누가 책임지라고 장애인끼리 사랑을 하게 만드나요? 저게 정상적인 연애인가요?" 발달장애가 있는 분들을 진료하는 입장에서 가족들이 얼마나 많은 짐을 져야 하는지 알기에 그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사랑에 정해진 자격과 형태가 있는 걸까? 그걸 타인이 결정할 권리가 있을까?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에서 엘라이자(샐리 호킨스)와 어인이 수조 너머로 교감하는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제공
그러면서 생각난 영화가 바로 기예르모 델 토로의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이었다. 기괴하면서도 아름답고, 동시에 사랑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다.
1960년대 냉전 시대 미국. 주인공은 정부 소속 기밀 연구소에서 일하는 언어장애를 가진 청소부 엘라이자(샐리 호킨스)다. 그녀 곁에는 두 사람이 있다. 늘 그녀의 편인 동료 젤다, 그리고 같은 아파트에 사는 노화가 자일스. 말 못 하는 여자, 흑인 여성, 나이 든 동성애자라는 저마다 다른 이유로 주류의 세계에 섞이기 어려운 그들이지만, 서로에게 기대어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어느 날 연구소에 인간과 어류의 경계 어딘가에 존재하는, 신비롭고 기괴한 생명체가 반입된다. 연구소의 보안 책임자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넌)는 이 생명체를 그저 실험 대상으로 취급하고 가혹하게 대하지만, 엘라이자는 몰래 다가가 달걀을 내밀고, 음악을 들려주고, 수어를 가르치며 교감한다. 그리고 그 결과 예상하지 못한 감정이 싹트기 시작한다.
관계의 언어를 만든 경험: 진짜 자기의 각성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에서 엘라이자가 어인에게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제공
엘라이자는 들을 수는 있지만 말을 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녀가 원하는 것,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들은 항상 한 박자 늦게, 불완전한 형태로 전달된다. 아무리 풍부한 내면을 가지고 있어도, 언어라는 통로가 막혀 있으니 관계 안에서 그녀는 늘 수동적인 위치에 놓이게 된다. 결국 그녀에게 주어진 건 끊임없이 타인의 언어에 맞춰 살아가야 하는 삶이다. 그 과정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무시와 경멸은 덤이다.
그렇기에 엘라이자는 사슬에 묶인 채 실험 대상으로 갇혀 있는 생명체('어인'이라고 지칭하겠다) 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자신처럼 말도 하지 못하고, 자유를 박탈당한 채 살아가는 연구소 안에서 가장 힘없는 존재. 처음 엘라이자가 그에게 느꼈을 감정은 자신과의 동질감에서 오는 연민과 안타까움이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엘라이자가 어인에게 본격적으로 다가가면서 관계의 속성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어인은 엘라이자가 내미는 달걀이 무엇인지, 음악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녀가 언어 장애를 지녔고 수어를 통해 소통해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른다. 그렇기에 그는 그녀가 알려 주는 것들을 순수하게,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그의 세계를 확장해 나간다. 상대가 자신이 내민 것을 받아들이고 그에 의해 변화하는 모습은 평생 타인의 주도하에 살아왔던 엘라이자에게 새로운 감각을 일깨워줬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처음으로 관계의 언어를 만드는 존재가 되는 경험인 것이다.
정신분석가 도널드 위니컷은 이것을 창조적 제스처(Creative Gesture)라고 부르며, '진짜 자기(True Self)'를 획득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로 보았다. 내가 자발적으로 어떠한 행동을 취했을 때, 환경이 그것을 파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용해 주는 경험이 충분히 이루어져야 비로소 억눌려 있던 진짜 자기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어인과의 교감은 엘라이자에게 바로 그 변화의 시작점이 됐다. 그 경험이 쌓이면서 단순한 연민은 서서히 애정으로 바뀌어 가고, 엘라이자는 어느 순간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일스에게 수어로 고백하는 장면이 그녀의 심리를 오롯이 보여 준다. "그는 내가 무엇이 부족한지, 내가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몰라요. 그는 나를 있는 그대로, 지금의 내 모습으로 봐줘요. 그리고 매번 나를 보면 기뻐해요." 평생 결핍된 존재로 취급받아 온 사람이 불완전함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고 있는 그대로 수용받는다는 것을 느꼈을 때, 그 감정이 어떠할지 감히 짐작할 수 있을까. 수면 아래 숨죽이고 있던 진정한 자기가 조심스럽게, 그러나 돌이킬 수 없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닫혀 있던 수문이 열리면 처음엔 거세게 쏟아지는 법이다. 사랑에 빠진 엘라이자는 달라진다. 그녀는 어인을 구출하자는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자일스에게 처음으로 격렬하게 화를 낸다. 허술한 탈출 계획을 세우고, 연구소의 규칙을 어기며 동료들을 위험에 빠뜨린다. 욕실 가득 물을 채워 어인과 유영하는 아름다운 장면 뒤에는, 아랫집 천장에서 물이 새어나와 곤혹스러워하는 이웃이 있다. 하지만 이 무모하고 이기적인 에너지조차도 진짜 자기가 깨어났다는 신호로 보아야 한다. 그녀는 지금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썩어 가는 손가락: 거짓 자기의 부패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엘라이자와 자일스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제공
이야기의 반대편에는 스트릭랜드가 있다. 그는 가진 것이 많다. 번듯한 직책, 그를 반기는 예쁜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멋들어진 틸그린색 캐딜락까지. 사회가 성공의 근거라 부르는 것을 모두 갖추었는데도, 그는 정작 편안해 보이지 않는다.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식탁에서도 그의 눈은 텅 빈 듯 어딘가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다.
영화는 스트릭랜드의 내면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그의 행동을 따라가다 보면 하나의 패턴이 보인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찾아 무시하고 위협한다. 어인을 고문하고, 엘라이자와 젤다를 모욕하고, 연구소 직원들에게 위압적으로 군다. 이것은 단순한 악의가 아니다.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불완전함을 직면하지 못하는 사람이 반복적으로 우월감을 확인함으로써 그 불안을 잠시 잠재우려는 시도다. 정신과 의사 제임스 길리건은 폭력의 근원이 수치심이라고 했다. 내가 나쁜 행동을 했다는 죄책감이 아니라, 내가 부족한 존재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위협. 그 수치심이 견딜 수 없을 때 사람은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공격함으로써 일시적으로 그 감각을 마비시킨다. 누군가를 밟고 올라설 때만 잠깐 숨을 쉴 수 있는 사람, 스트릭랜드는 그런 인물이다.
위니컷은 환경의 기대에 맞춰 사는 삶을 '거짓 자기(False Self)'라고 불렀다. 진짜 자기가 억압된 사람은 타인의 시선과 기대로 구축된 삶의 기준 속에서 살아간다. 스트릭랜드가 이룬 성취들은 진정한 자기의 표현이 아니라, 거짓 자기를 유지하기 위한 소품들이다. 그래서 그는 가진 것을 즐기는 대신 잃을까 봐 두려워하며, 가짜 자기감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힘을 끊임없이 과시하면서도 결국 공허한 눈을 한 채 집으로 돌아간다. 아무리 많은 것을 쌓아도 그것이 진정한 나의 욕구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충만함은 끝내 오지 않는다.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시커멓게 썩어 가는 그의 두 손가락은 타인을 짓밟을수록 더 깊이 부패해 가는 그의 내면을 보여 주는 은유다.
엘라이자와 스트릭랜드, 두 사람의 삶은 이처럼 극명하게 갈린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여자가 가장 충만하고, 모든 것을 가진 남자가 가장 공허하다. 이 역설이 우리에게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향해 살고 있는가. 타인의 시선이 정해 준 성공의 목록을 채우기 위해 달려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진짜 자기’는 그 목록이 채워졌을 때 과연 깨어날 수 있을 것인가.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할 권리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의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넌·왼쪽).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제공
엘라이자와 어인의 사랑은 독특한 모습으로 보일지언정 우리가 평생 해온 사랑의 특질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상대의 어디가 좋냐고 물었을 때 막상 한 가지를 꼽지 못하면서도, 그 사람만 생각하면 미소가 피어오르며 "그냥 좋아"라고 말하게 되는, 논리적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이 이상한 감정이야말로 사랑의 가장 순수한 원형이 아닐까. 그러니 사랑의 형태에 대해서 우리는 조금 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다양성이 강조되는 시대에 살면서도, 동시에 타인의 삶을 자신의 기준으로 재단하고 그것을 서슴없이 표현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그런 사람들은 누구를 만나서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는지에 대해 정답지를 쥔 것처럼 옳고 그름의 잣대를 들이민다. 각자의 삶에는 각자의 맥락이 있다는 것, 내가 보지 못하는 이면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듯하다.
영화의 제목처럼 사랑은 물의 모양을 닮았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삶도 그렇다. 물은 담는 그릇에 따라 형태가 변하지만, 동시에 그 어떤 그릇에도 완전히 갇히지 않는다. 내가 가진 그릇의 모양이 유일한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의 사랑이, 나아가 삶이 이해할 수 없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사랑과 삶의 형태를 고정해 둔 편견의 그릇이 너무 견고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기괴하면서도 아름다운 동화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건네고 싶은 이야기는 무언가를 판단하기 전에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일 수 있는 물과 같은 유연함을 가지자는 것 아닐까. 엘라이자와 어인이 서로를 그렇게 바라보았듯이.
오동훈 연세온정신건강의학과의원 대표원장
www.koreatimes.net/기획기사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