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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맞는 노년기의 과업
일상 속 작은 장면들이 버팀목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Jun 04 2026 12:17 PM
독일 심리학자인 에릭 에릭슨의 심리사회적 발달 단계라는 이론이 있다. 그는 인간의 삶을 여덟 단계로 나누고, 각 시기마다 인간이 마주하는 심리적 과제를 설명했다. 에릭슨은 정신분석의 대가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딸 안나 프로이트에게 정신분석 훈련을 받은 사람인데, 프로이트의 이론을 확장해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개인이 어떻게 정체성을 형성하고 성장하는지에 주목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릭슨은 인간이 죽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발달하고 변화한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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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생 시절 해부학, 내과학 같은 빡빡한 과목들 사이에 잠깐 숨을 돌리며 배우던 개념이다. 성장과 노화 같은 인문사회의학 수업에서 말이다. 그 개념이 요즘 계속 떠오른다. 30대의 절반이 지나갔고 40대를 기다리고 있다. 에릭슨의 생애 단계 중 청년기의 과제인 친밀감과, 중년기의 과제인 생산성이라는 두 가지 압박을 동시에 받고 있다. 사랑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다음 세대를 위한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 이 개념을 들었을 땐 인간의 삶은 과학처럼 딱 잘라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마다 살아온 환경과 목표도 모두 다른데 어떻게 저렇게 단언할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이를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 같다. 나도 내 나이에 맞는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인간 삶의 형태가 다 비슷비슷한 것일 수도 있겠다.
노인들도 그들의 과업을 고민한다. 에릭슨은 노년기의 과업을 ‘자아 통합 대 절망’이라고 했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의미를 찾는 것, 그것이 노년기에 이뤄야 할 과업이다. 달성에 실패하면 자신의 인생이 헛되었다는 절망과 후회에 빠진다고 했다.
진료실에서 불행한 소식을 전할 때, 절망과 후회를 목격하곤 한다.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 조금이라도 더 살려달라며 애원하는 어르신을 바라볼 때 복잡한 감정이 든다. 반면 이미 에릭슨이 말하는 자아 통합을 이룬 듯 미련 없이 치료 연장을 중단하는 분들도 있다. 죽음을 수용하는 용기에 존경심이 들기도 한다.
노년기에 더 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실패일 리 없다. 에릭슨의 이론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통찰이지, 그대로 살아야 한다는 지침은 아니다. 어떤 이는 삶을 받아들이며 통합에 이르고, 어떤 이는 미련과 결핍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내려 한다.
덤덤히 수용하든 맹렬히 저항하든,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엇을 이뤄냈는지, 어떤 역경을 이겨냈는지 알게 될 때가 있다. 그렇게 한 사람의 삶을 관통하는 서사를 듣고 나면, 그 모습이 단순한 집착이 아니라 삶에 대한 의지처럼 느껴진다.
‘숨결이 바람 될 때’란 책을 쓴 폴 칼라니티는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신경외과 전공의 과정을 마치던 중 36세에 폐암 4기 진단을 받았다. 죽음을 앞둔 그는 남은 시간을 최대한 행복하게 보내는 방법을 찾았다. 글을 쓰고, 딸을 낳고,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하며 삶의 의미를 만들어갔다.
오랜만에 가족들을 만나 따뜻하게 차린 밥 한 끼를 먹었다. 여섯 살 난 조카는 쿠키를 원하는 대로 받지 못했다고 인생의 좌절을 겪고 있었다. 그 녀석을 토닥이며 뒹굴거리다 보니, 필자의 고민도 같이 녹아내렸다. 필자의 쓸쓸함과 압박이 죽음을 앞둔 노년의 고민과 같은 무게일 수는 없다. 다만 삶의 어느 시기든, 좌절 앞에서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은 결국 일상의 작은 장면들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장건영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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