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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잡으려 하면 달아나
하루 묵묵히 살다 보면 ‘작은 얼굴’로 찾아와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May 24 2026 12:01 PM
‘나는 충분히 행복한가’ 묻는 순간 그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의무가 돼 열심히 추구하면 오히려 불안해져 밥맛 돌아오고, 꽃 냄새 느껴지고 길 가는 강아지에 웃게 되는 것... 행복은 대개 그런 얼굴 하고 있어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실에는 가끔 별로 아파 보이지 않는 분들이 찾아온다. 남들이 보기엔 제법 괜찮은 삶이다. 크게 아픈 데도 없고, 가족관계가 완전히 무너진 것도 아니다. 통장 잔고가 재벌 수준은 아니지만 적어도 마이너스 인생은 아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의자에 앉자마자 조용히 이런 말을 꺼낸다.
"선생님, 저는 왜 행복하지 않을까요?"
그 질문을 들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아, 또 행복에 너무 진심인 분이 오셨구나.'
요즘 사람들은 행복을 감정이 아니라 프로젝트처럼 다룬다. 스펙처럼 관리해야 하고, 성취해야 하고, 업그레이드해야 하는 무엇처럼 말이다. 운동 루틴을 만들고, 명상 앱을 깔고, 감사일기를 쓰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행복해 보이는 사진들을 차곡차곡 올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애쓸수록 더 공허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행복한지 묻는 순간 사라지는 행복
우리는 자꾸 삶 바깥으로 걸어 나와 묻는다. "나는 지금 충분히 행복한가?" 그 순간 행복은 관찰과 평가의 대상이 된다. 행복은 그렇게 멀어진다. 일러스트=신동준 기자
몇 해 전, 40대 직장 여성 한 분이 찾아왔다. 요가도 배우고, 마음챙김 강의도 듣고, '행복해지는 법'이라는 제목의 책은 거의 다 읽었다고 했다. 주말마다 브런치 카페를 찾아다녔고, 여행도 열심히 다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침에 눈을 뜨면 이런 생각이 먼저 들더란다.
'오늘도 행복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행복이 목표가 되는 순간, 삶은 시험장이 된다. 그리고 시험장에서 웃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분은 행복을 위해 그토록 애쓰다가 그 애씀에 지쳐버린 것이었다.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젊은 시절 극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공리주의를 체계화한 지성인이었지만, 정작 자신의 내면은 텅 빈 상태였다. 그 고통 끝에 그는 이런 결론을 남겼다. "행복한지 스스로 묻기 시작하는 순간, 행복은 사라진다." 행복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것이 오히려 행복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역설이었다. 행복의 공식을 발명하려던 사람이 행복을 포기하는 법을 배웠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진짜 공식이었는지 모른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다. 정말 행복한 순간은 자신이 행복한지 측정하지 않는다. 아이와 웃고 있다든지, 친구와 술잔을 부딪치고 있다든지, 오래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든지. 그냥 그 순간 그 감정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삶 바깥으로 걸어 나와 묻는다.
'나는 지금 충분히 행복한가?'
그 순간 행복은 관찰과 평가의 대상이 된다. 잠들려고 너무 애쓰면 오히려 잠이 달아나는 것처럼, 행복도 그렇게 멀어진다. 행복은 손에 쥐려는 순간 새처럼 날아간다. 그러니 행복을 직접 겨냥하는 것 자체가 이미 문제의 시작일 수 있다.
현대사회는 우리를 끊임없이 비교하게 만든다. SNS에는 누군가 몰디브에서 석양을 보고 있고, 누군가는 고급 호텔 조식을 먹고 있으며, 친구는 완벽한 가족사진을 올린다. 물론 그 사진 뒤에도 피곤함과 부부싸움과 카드값 고지서가 존재하겠지만, 사람의 마음은 남의 하이라이트와 내 삶의 날것 그대로를 비교하는 데 익숙하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행복 산업'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행복을 가르쳐 준다는 강연, 행복 코칭, 힐링 상품들이 넘쳐난다. 정작 행복을 가장 열심히 추구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가장 불안해 보이는 이유가 여기 있다. 행복을 삶의 목표로 삼는 순간, 그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의무가 된다. 의무가 된 행복은 더 이상 행복이 아니다.
"언젠가 잃게 될 것을 가끔 떠올려보라"
마음정비사 일을 오래하면서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우울증에서 회복되는 사람들은 대단한 기쁨 때문에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회복의 시작은 아주 사소하다. 밥맛이 돌아오고, 꽃 냄새가 느껴지고, 길 가는 강아지를 보며 잠깐 웃게 되는 것. 어떤 환자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오늘 점심에 먹은 식당 국물 간이 딱 맞더라고요."
그 말을 들으며 나는 꽤 감동했다. 삶의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직업을 택하길 잘했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면 바로 그런 때다.
우리는 흔히 행복이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행복을 알아차리는 감각이 무뎌진 경우가 많다. 치료는 없었던 행복을 새로 만들어주는 작업이 아니다. 이미 곁에 있던 작은 기쁨들을 다시 볼 수 있게 돕는 과정에 가깝다. 행복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아보는 눈이 잠시 흐려진 것이다.
영화 '아메리칸 뷰티' 마지막 장면이 종종 떠오른다. 삶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 같던 중년 남자가 죽기 직전, 바람에 흔들리는 비닐봉지를 바라보며 이상할 만큼 충만함을 느끼는 장면이다. 거창한 성공도 아니고 대단한 깨달음도 아니다. 그냥 '지금 여기'에 이미 존재하던 순간이다. 일본 영화 '원더풀 라이프'도 마찬가지다. 죽은 뒤 천국으로 가기 전, 생애 가장 행복했던 기억 하나만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선택하겠느냐고 묻는 영화다. 흥미롭게도 사람들은 대단한 순간보다 아주 평범한 기억을 꺼낸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먹었던 우동, 여름날 선풍기 바람, 누군가와 손을 잡고 걷던 저녁길. 행복은 대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다. 거창하지 않고, 조용하고, 무심코 지나쳐버리기 쉬운 얼굴.
스토아 철학자들은 흥미로운 처방을 내렸다. 언젠가는 잃게 될 것들을 가끔 떠올려 보라는 말이다. 건강도, 사람도, 오늘 하루도 영원하지 않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실을 인정하면 오히려 현재가 선명해진다. 저녁 식탁의 따뜻한 국 한 그릇, 퇴근길 바람 냄새, 가족과 나눈 시시한 농담이 갑자기 귀해진다.
불교에서 "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괴로움은 선택"이라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삶의 어려움 자체보다 '왜 나는 늘 행복하지 않을까'라는 저항이 우리를 더 지치게 만든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로마 황제의 자리에서 매일 밤 스스로에게 쓴 일기도 어쩌면 이 단순한 진실을 잊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는지 모른다.
행복은 목적지가 아닌 살아가는 방식
행복은 원래 그렇게 작은 얼굴로 찾아온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너무 거창하게 상상한다는 데 있다. 나는 행복론 강의보다 동네 국밥집에서 더 많은 위로를 받은 중년 남성을 꽤 많이 안다. 인생은 테드(TED) 강연처럼 살 수 없는데, 사람들은 자꾸 자기 삶을 자기계발 영상과 비교한다. 이 세상엔 언제나 나보다 잘난 사람이 존재하는 법이니, 그러니 지칠 수밖에 없다.
행복은 '늘 웃는 상태'가 아니다. 슬픔도 있고, 지침도 있고, 허무한 날도 섞여 있는 것이 정상적인 삶이다. 그 모든 감정을 살아내면서도 오늘 하루를 너무 놓치지 않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완벽하게 행복한 인생을 설계하려다가 오늘이라는 하루를 통째로 낭비하는 일이 우리 삶에서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생각해보면, 이건 꽤 심각한 손해다.
몇 달 뒤, 그 여성 환자가 다시 진료실에 왔다. 얼굴이 예전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
"요즘은 어떠세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는 걸 좀 그만뒀어요. 그냥 하루를 사는데, 그게 오히려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나는 그 말이 어떤 교과서보다 정확한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치료의 결과가 아니었다. 스스로 찾아낸 답이었다.
행복은 목적지가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인 것 같다. 붙잡으려 하면 달아나지만, 오늘 하루를 묵묵히 살아가다 보면 어느새 발끝 가까이 와 있는 그림자 같은 것. 어쩌면 행복은 원래 그런 존재일 것이다.
한창수 고려대 구로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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