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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떠나 강가에 ‘뼈 갈아넣은’ 슈메르인들
5000년前 도시 문명 세우다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May 24 2026 12:04 PM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시작과 발전
우리가 사는 아시아 대륙 반대편에서 일어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약 5,000년 전 인류가 강가에 '도시'를 세우면서 시작했다. 그렇지만 서아시아 사람들이 이런 결정을 쉽게 내린 것은 아니었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는 지역, 그러니까 현대의 이라크 남부 지역은 고대에도 강우량이 적고 건조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땅을 경작하여 곡식과 열매를 얻고 가축을 기르기 시작할 무렵의 인류는 그리 덥지 않고 비도 충분히 오는 곳에 마을을 세웠고, 그 마을들은 대개 이라크와 이란 사이에 있는 산지 계곡이나 산기슭에 모여 있었다. 큰 욕심이 없는 사람들은 산지에서 열심히 일해 가족을 부양하는 데 만족했을 것이다.
우르에서 발견된 장식된 가구의 일부. 슈메르 사람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다. 위키피디아 커먼즈
반면 위험을 무릅쓸 준비가 된 사람들은 더 넓은 경작지를 찾아 살기 좋은 고향을 떠났다가 강가에 펼쳐진 거대한 평야를 만났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수로를 건설하고 강물을 끌어들이면 산골과 비교할 수 없는 큰 수확을 얻을 수 있을 터였다.
물론 물길을 내고 둑을 쌓는 작업은 혼자서 괭이 하나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여러 사람이 함께 힘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대규모 관개사업을 계획하고 감독하고 또 매년 보수하기 위해 규모가 크고 잘 조직된 사회가 탄생하게 된다. 다행히 이들의 선택은 성공을 거두었고, 이들의 성공을 보고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들었다. 이런 식으로 인류가 목격하지 못했던 큰 거주지가 강가에 형성되면서 처음으로 도시 문명이 탄생하게 된다. 문명은 노동자들이 뼈를 갈아 넣어 일으킨 셈이다.
기원전 3000년 무렵 등장한 쐐기문자
원쐐기문자로 기록된 장부. 보리 출납 사항을 숫자와 함께 기록한 문서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커먼즈
여기에서 한발 물러서 질문해보자. 21세기의 현대인이 이렇게 오래전에 존재했던 도시 문명에 대해 알고 싶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위에서 묘사한 문명의 발생 과정이 단지 상상이 아니라면 그 증거는 무엇일까?
가장 확실한 자료는 고고학 발굴을 통해 찾을 수 있겠지만, 강가에서 진흙으로 빚은 벽돌로 집을 짓고 살았다 보니 많은 건물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아무래도 글로 쓰인 기록이 나와야 분명한 자료로써 사용할 수 있는데, 메소포타미아 문명 연구의 경우는 기원전 3,000년이 되기 얼마 전 그림문자에서 파생해 등장한 쐐기문자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처음엔 진흙을 두드려 만든 점토판 위에, 갈대를 날카롭게 깎은 필기도구로 물품 이름과 숫자를 적어서 장부를 작성했다. 쐐기문자는 서아시아 사람들의 실용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탄생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편지와 계약서가 나타났고, 신전에 바치는 물품에 적은 헌정문과 지배자들이 자기 업적을 자랑한 기념문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 같은 문서들을 통해 고대 사회의 경제와 행정과 무역 분야는 물론 문학과 종교, 법률, 외교 그리고 역사를 논의할 수 있는 기초 자료를 얻는다.
이런 점토판은 개인 서고와 주요 기관의 문서 보관소에서 발견되었는데, 특히 신전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초기 메소포타미아 도시 우눅(후대의 우룩)에선 일반 거주지보다 높이 쌓은 축대와 신전 건물이 발굴됐다. 이 신전은 물론 신상을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곳이었지만, 도시 경제의 중심기관이기도 했다. 신전은 대규모 농지를 소유하고 농업에 종사하는 도시민들을 관리했으며, 수확한 곡물과 공업 생산품을 저장했고, 이를 거주민들에게 보수로 지급하는 재분배까지 담당했다. 전문적인 서기들이나 사제들은 이 모든 과정을 장부에 쐐기문자로 기록했다. 그러니까 우눅 사람들은 신전에 드나들며 '안'과 '인안나' 신을 자신들의 참된 주인으로 섬겼을 뿐만 아니라, 신들이 주는 직장에서 일하며 신들이 주는 음식을 먹었던 것이다.
장대한 무역망 갖춘 도시국가로
슈메르 도시 우눅의 신전탑 유적지. 위키피디아 커먼즈
이렇게 볼 때 초기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도시화'로 특징지을 수 있고, 관개 농업과 관료체제는 도시의 근간이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고려할 점은 장거리 무역망이다. 동남쪽으로 인더스 계곡과 파키스탄, 북쪽으로 아르메니아, 서쪽으로 튀르키예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오가는 상인들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있다. 당시 상황을 보면, 청동기 시대를 이끌어 가기 위해 꼭 필요했던 구리와 주석은 이라크 남부에서 구할 수 없었고 메소포타미아 지배층 인사들이 좋아했던 청금석은 가장 가까운 광산이 파키스탄에 있었다. 반대로 초기 도시 거주민들은 농업이 발전하면서 윤작을 통해 보리와 밀을 생산했고 양과 염소, 돼지 같은 가축을 사육했을 뿐 아니라 세공 금속이나 직물 등 공예품을 만들었다. 이렇게 수입해야 할 자원과 수출할 수 있는 생산품들이 정해지면서 장거리 무역은 도시 번영의 기반이 되었는데, 이런 교역을 통해 얻은 부와 외부 문화의 영향은 지배층 인사들이 주로 향유했다.
도시 사회가 번영하면서 생긴 한 가지 예상하지 못한 변화는 도시 간의 경쟁과 갈등이었다. 인구가 집중되면서 더 많은 경작지가 필요해진 와중에 날씨까지 점점 건조해져 살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몇몇 사람의 싸움이 국지전으로 확대되면서 군대를 통솔할 지도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초기 도시들은 각자 '주인(EN)' 또는 '큰 사람(LUGAL)'이라고 부르는 지도자를 선출해서 군사를 통솔하게 했고, 이런 지도자들이 정치적 권력을 획득하면서 왕권과 국가 권력이 발생하게 된다. 이런 도시국가 왕들은 '신이 백성을 돌보라고 부른 목자'를 자처하면서 권력을 확장해 나갔고, 군사력을 통제할 뿐만 아니라 월력과 도량형을 정리하고 세금을 징수하는 등 경제와 행정 영역을 통솔하면서 신전 못지않은 왕궁을 짓기 시작했다.
한편 도시국가 거주민들은 전형적인 가부장제 가계 구조를 확립하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업을 물려주며 재산을 상속하는 질서를 따랐다. 여성은 아버지의 딸이었다가 남편의 아내 그리고 자식들의 어머니로 살았고, 집안일을 하면서 직조 및 가내 상점 관리를 맡기도 했다. 상업과 무역 역시 상인 가문의 가업이었는데, 신전과 궁전이 자원을 통제하긴 했지만 사기업 상인들 또한 번성했고 대부업이나 금융업도 일찍부터 발달했다.
당대엔 '한 민족' 의식 없었지만, 후대서 '슈메르'로 통칭
복원 사업을 거쳐 재건된 슈메르 도시 우림과 신전탑. 위키피디아 커먼즈
위에서 언급한 우눅 이외에도 우림(후대의 우르), 라가쉬, 키쉬, 니브루(닙푸르), 에리둑(에리두), 움마 등 여러 도시가 서로 교류하며 경쟁했는데,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며 같은 언어를 썼지만 서로를 한 민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더 큰 나라를 건국하려 하지 않았다. 자기들이 사는 땅을 '고귀한 주인들의 땅(KI.EN.GI)'이라고 부르면서도 이 이름이 국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이런 시대가 기원전 24세기까지 지속됐지만, 후대 사람들은 그들과 그들의 도시를 '슈메르'라는 이름으로 불렀고 자신들의 문화와 종교는 물론 정치와 경제 제도를 처음으로 확립한 조상들이 슈메르 사람들이라고 고백했다.
현대 학자들이 '초기 왕조 시대'라고 부르는 이 시기는 지금부터 5,000년 전 이야기이지만 메소포타미아 사회는 고도로 조직화된 도시 문명이었고, 현대의 통치 및 경제 체계와 유사한 제도와 기술을 보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자, 법률, 무역망과 같은 실용적인 제도들을 창조하며 후대 문명의 토대를 마련했다. 더 읽을거리로는 영국 학자 니컬러스 포스트게이트의 저서 '초기 메소포타미아(Early Mesopotamia)'를 추천한다.
윤성덕 연세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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