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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특집 】프리먼 장군 공산군 서울진출 막다
지평리 전투 승리로 이끈 지휘관
- 김명규 발행인 (publisher@koreatimes.net)
- Jun 29 2026 04:32 PM
다리에 파편 박혀도 후송 거부
지평리(砥平里)전투
1951년 2월13일부터 16일까지,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지평리 일대.
배경
1950년 10월 중국 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유엔군은 1.4 후퇴(51년 1월4일 서울 철수)와 장진호(함경북도) 전투 등에서 참담한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평택-원주-삼척 전선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1951년 2월부터 반격에 나섰다. 중공군은 유엔군이 한강을 회복하고 다시 공세에 나서자, 강원도 횡성과 홍천 사이의 삼마치 고개 및 지평리로 대규모 공격을 가했다. 지평리를 점령해 남한강을 도하한 뒤 서울 남쪽으로 진출하려는 목적이었다.
전투 과정
미 제2보병사단 제23연대전투단(23RCT)과 그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가 원형 방어진지를 구축한 채, 2월13일 저녁, 중공군 2개 사단이 8차례에 걸쳐 파상공격을 했으나 미군은 모두 격퇴했다. 이날 폴 프리먼 23연대장이 부상을 입었지만 후송을 거부하고 지휘를 계속했다. 2월14일, 미국은 공중보급으로 물자를 보급했고, 리지웨이 8군 사령관이 직접 헬기로 연대를 방문해 격려했다. 그날 저녁 중공군은 4개 사단 규모로 재차 공격해 일부 진지를 돌파, 백병전이 벌어졌지만 결국 미군과 프랑스군이 진지를 사수했다.
완전히 포위된 상태에서, 마셀 크롬베즈(Marcel G. Crombez) 대령이 지휘하는 미 제1기병사단 제5기병연대 3대대를 주축으로 한 특별임무부대가 전차 23대에 보병을 태우고 적진을 돌파, 2월15~16일 지평리에 도달해 포위를 풀었다.
결과
결과는 유엔군의 승리였다. 이 전투는 원주 3차 전투와 함께 "한국전쟁의 게티스버그"로 불리며, 중공군 남침의 '최고 수위선(high-water mark)'을 나타낸다. 23연대는 전사 52명, 부상 259명, 실종 42명의 피해를 입은 반면, 중공군은 약 5천 명의 사상자를 냈다.
역사적 의미
이 전투는 미군이 중공군을 상대로 거둔 최초의 전술적 성공으로, 유엔군이 새로운 각오로 강력한 공격작전을 구상할 수 있는 전환점이 됐다. 연이은 패배로 사기가 떨어졌던 유엔군은 이 승리로 다시 자신감을 회복했고, 인해전술도 화력과 견고한 방어로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최초의 전투가 됐다. 이를 계기로 유엔군은 중공군을 38도선 북방으로 밀어내는 재반격의 기반을 마련했다.
전투의 공훈으로 프랑스 대대는 한국·미국·프랑스 정부로부터 표창을 받았으며, 한국 국방부는 1957년 지평리에 전적비를 건립했다.
프리먼의 제23연대는 3만 명 규모의 중국 공산군 공격을 받았다. 설마, 설마하면서 무시했던 중국군의 공세였다.
2018년 11월의 어느 서늘한 날, 미 제2보병사단은 경기도 평택 캠프 험프리스에 세워진 새 사령부 건물 프리먼 홀(Freeman Hall)의 준공식을 가졌다. 이 행사에서 30년 전 서거한 폴 프리먼 주니어(Paul L. Freeman Jr. ) 장군을 기리는 명판이 소개됐다. 프리먼 장군은 당시 대령으로 한국전쟁서 미군 제23보병연대 전투단을 지휘하며 낙동강 유역부터 1951년 2월 지평리 전투에 이르기까지 탁월한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그의 연대는 두 차례 미국 대통령 부대표창을 받았으며, 프리먼 장군은 무공훈장(Distinguished Service Cross), 퍼플 하트 훈장, 그리고 프랑스 무공훈장(Croix de Guerre with Palms)을 수여받았다. 그는 지평리에서 부상 당한 후 부대를 계속 지휘, 중공군을 격퇴했다.
1907년 6월 필리핀에서 태어난 장군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1929년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 톈진에 배치되었다.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중국, 버마, 인도 전선에 2년간 파견되어 중국 문화와 중국어에 대한 지식을 습득했다. 한때 워싱턴주 포트 루이스에 주둔한 제2보병 사단 제23보병 연대를 지휘했다. 전투계획 담당자였기 때문에 실전 경험은 없었다.
1950년 6월25일 북한군이 남침하자 미국은 즉시 제2보병사단을 포함한 미군을 파견했다. 예하 3개 연대는 그해 8월에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전선에 투입되어 8월 말과 9월 초 대구시 인근 낙동강변에서 북한군과의 첫 전투를 경험했다. '토마호크'라는 별명을 가진 보병 23연대와 제9연대는 인민군의 미군 방어선 돌파 공세를 정면으로 물리쳤다. 사단장은 강력한 방어태세 구축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나 프리먼 소령은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대처했다.
폴 프리먼 장군이 미 대륙군 사령부(CONARC)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프리먼은 부하들에게 모습을 보이고 가능하면 직접 명령을 내리는 지휘관이었다. 동시에 그는 부하들을 존경, 헌신을 아끼지 않았고 부하들은 그에게 늘 충성했다. 그는 또한 부대가 후퇴할 경우 막대한 손실을 본다는 점을 주목, 차라리 전선사수를 최선의 전략이라고 판단했다.
9월20일 유엔군이 공세에 나서자 전세가 바뀌었다. 유엔군은 낙동강을 건넜고, 존폐가 경각에 달렸던 한국은 살아났다. 이후 두 달 동안 ‘토마호크’ 부대는 북으로, 북으로 진격했다.
한국전 당시의 주요 전선.
유엔군이 압록강변, 중국과의 국경에 접근하자 베이징의 주은래 수상은 경고를 보냈다. 한국군의 북진은 용납하지만 유엔군의 3.8선 월북은 좌시하지 않겠다고. 그러나 신나게 북진하던 연합군에게 이 경고는 일종의 공갈에 지나지 않았다. 경고는 철저히 무시됐다. 불행하게도 중국군의 참전 증거를 미국 고위 당국자들은 믿지 않았다.
그러나 프리먼은 달랐다. 그는 가장 먼저 중국군 개입의 냄새를 맡았다. 11월 말부터 그는 중국의 반격에 대비하여 청천강변을 따라 부대를 배치했다. 중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포로들을 심문, 그들에게서 정보를 얻었다. 그러나 중국군은 유엔군을 기습, 제2보병 사단 제9연대, 제38연대에게 큰 피해를 주었으나 23연대는 프리먼의 뛰어난 지휘 덕분에 인명손실을 최소화했다.
구누리에서 미군이 다리를 건너 후퇴하는 동안 제23연대는 후방 경비임무를 차질없이 수행했다.
프리먼은 위기가 닥칠 가능성과 끝없는 교통 체증을 목격하고는 “이래서는 모두가 당하겠다”고 판단, 다른 후퇴경로를 찾았다. 그는 안주에서 미 제1군단이 통제하는 경로를 발견했다. 그러나 이 도로를 이용하려면 상부의 허가가 필요했는데 그 과정에서 논란이 일었다. 마침 이때 사단에서는 무슨 방법이라도 써서 안전한 통로를 이용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이에 힘을 얻은 그는 나중에는 군법에 회부되든지, 칭찬을 받든지 간에 우선 안주 경로를 이용해서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호위 포병대에게 남은 3,206발의 포탄을 모두 발사하게 한 후 그동안 부대를 이끌고 큰 사상자 없이 빠졌다. 앞을 내다보고 선택한 탁월한 전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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