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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잎 속의 누릉지
고길자(문인협회)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Jul 02 2026 04:24 PM
찌는듯하던 더위가 주춤하고 제법 선선한 주말에 딸이 따끈따끈한 파스타를 만들어 왔다. 예쁜 유리그릇에 정갈하게 담긴 그 음식을 대하는 순간 눈이 즐거웠다. 요즘 입맛이 없던 나는 좋은 식재료가 듬뿍 들어간 파스타로 오랜만에 맛있는 점심식사를 하였다. 밥이 당기지 않아 저녁에도 같은 음식으로 한 끼를 때우고 나니 솥에 밥이 그대로 남아 있다. 옛날엔 찬밥이 귀찮은 존재였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 방식대로 고소한 누릉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곧장 약불에 팬을 올려놓고 소량의 물을 부은 다음 그 위에 밥을 얇게 펼쳐놓았다. 주걱에 물을 적셔 여기저기 생긴 틈새를 메꾸어 가며 꾹꾹 눌러주다가 제대로 모양새가 잡힌 것을 보고 중약불로 돌려놓았다. 누릉지가 익어가는 동안 문우들의 수필을 읽으며 차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여유를 즐겼다. 밥알의 수분이 잦아드는 소리와 함께 구수한 냄새가 나기 시작하자 스페출러(뒤집개)로 뒤집어서 다른 쪽도 똑같이 구워주었다. 혹자는 누릉지를 새까맣게 태워서 숭늉을 만들어 마시면 몸 안의 염증을 완화시키고 독소를 없애주는 등 약보다 더 좋은 음료라 하는데 나는 태운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짙은 갈색과 노랑색이 적당히 어우러진 바삭한 누릉지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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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릉지를 만들 때마다 생각나는 어릴 적 동무가 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한 교실에서 공부한 ‘유 석분’ 이란 친구인데 그녀는 도시락 대용으로 늘 호박잎으로 싼 누릉지를 들고 왔다. 점심시간에 그는 책상 밑으로 누릉지를 숨기고 조금씩 떼어서 먹곤 했는데 가끔 나에게 작은 조각 하나를 건네주기도 하였다. 그 맛이 너무도 고소해서 할머니한테 누릉지를 만들어 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떠오른다. 전쟁 후의 가난했던 시절 누릉지는 단순한 간식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한 끼의 식사였던 것이다. 석분이는 예쁘장한 얼굴에 키가 아주 작은 똑똑한 아이였다. 3학년 때까지 그녀와 나는 남자아이들을 제치고 늘 1,2등을 차지할 만큼 공부를 잘했다. 그런데 4학년 무렵부터 농사철이면 그녀가 자주 결석을 하였다. 그와 같은 동네에 사는 반 친구 남순에게 물어봤더니 온 식구가 들일을 나가면 돌 지난 조카를 돌봐야 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육이오 전쟁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의 집은 너무도 가난하여 온 식구가 날품팔이를 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자연히 그녀의 성적은 점점 뒤로 물러났고 생글생글 잘 웃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비가 많이 오던 어느 날 며칠 만에 학교에 온 그녀를 본 순간 반갑기도 했지만 마음이 너무 아파서 공책 뒷장을 찢어내어 편지를 썼다. 그때가 5학년 봄쯤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용기를 잃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여 옛날처럼 다시 1,2등을 차지하자”라는 내용의 글과 함께 연필 두 자루를 아무도 모르게 그녀 손에 쥐어 주었다. 그 애는 몽당연필에 나무로 된 무슨 깍지 같은 것을 끼워 글씨를 썼는데 그게 자꾸 빠져서 애를 먹는 모습을 본 나는 그에게 주려고 연필 두 자루를 며칠째 들고 다녔었다. 다음날 남순이를 통하여 석분이가 보내준 작은 선물을 받았다. 낡은 광목천안에 들어있던 물건은 호박잎으로 가려진 누릉지와 편지였다 “언니 같은 친구에게”라는 제목의 글 속에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결심과 고마운 벗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어서 너무 슬프다는 마음을 적었다. 그리고 나에게 1등자리를 끝까지 지키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녀가 보내준 호박잎 속의 누릉지에는 서로를 향한 우정과 신뢰와 배려가 녹아 있었다. 그것은 순수한 마음과 마음이 오고 갔던 따뜻한 정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고 졸업식 때 석분이는 우등상장을 손에 쥐었고 나는 1등을 하여 도지사상을 받았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유년의 아름다운 추억이다.
쌀이 넘쳐나고 먹거리가 풍부해진 오늘날 누릉지의 위상이 사뭇 달라졌다. 과자처럼 만들어 마트에서 팔기도 하고 식당에서는 해물 누릉지 탕을 만들어 인기 메뉴로 개발하기도 하였다. 아직 먹어 보지는 못했지만 누릉지 백숙도 있다고 한다. 민족의 애환 속에 세월이 빚어낸 가장 한국적인 음식 누릉지의 변신은 우리 사회의 성장과 발전을 그대로 보여주는 하나의 단면이기도 하다. 소박하지만 위대한 맛으로 우리 곁을 지켜주는 누릉지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진화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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