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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라기
황로사(문인협회)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Jul 09 2026 12:23 PM
캐나다가 나에게 주었던 첫 인상은 '블루'였다. 이민을 염두에 두고 밴쿠버로 답사를 왔을 때, 저녁 어스름에 올려다 본 하늘은 크고 작은 별들을 품고있는 코발트 블루였다. 엽서에서 보았던 이국의 하늘 빛깔이 어느 정도는 물감으로 덧칠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 색깔 그대로 내 눈 앞에 펼쳐있었다. 한국에서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청청한 쪽빛 하늘. 넋놓고 바라보는데 표현하기 힘들 만큼 시원한 기운이 가슴을 채워 주었고, 이민에 대한 망설임을 정착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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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파스 상자 속에 들어있던 순수한 파랑색은, 연한 환상을 품게하며 파스텔톤 스카이 블루가 되기도 했고, 안개 속 바다 한 가운데 혼자 떠있는 듯한 검푸른 색을 띠기도 했었다. 신비하고 순수하게 느껴졌고, 때로는 희망을 갖게했던 색, 블루가 ‘우울’이라는 단어와 친하다는 것을 알고는 좀 의아스럽기도 했다. 크고 작은 물결을 타게했던 캐나다에서의 삶에 적응이 되고 안정되기 시작한 건, 환경이나 상황이 달라져서가 아니라 웬만한 건 초연하는 나이가 되면서 시작되었을 지도 모른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세상 속에 살다가 의식이 나를 깨운 듯 싶으면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바라보곤 한다. 시각의 방향만 바꿀 뿐인데, 구름만으로 환상적인 수채화를 선사하는 하늘은 평화로운 무언가를 늘 내면에 넣어주곤 한다. 나에겐 그만한 게 없을 만큼 쉽고도 효과있는 마음 정화 방법이다.
몇 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언니들이 데리고간 찜질방에는 옥상에 노천탕이 있었다. 뜨거운 물이 차가운 공기와 만나며 수증기가 안개같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물 속에 들어가 누우니 보이는 건 컴컴한 하늘 뿐이었다. 몸은 온기 속으로 녹아드는 것 같았고, 얼굴을 스치는 쌀랑한 바람은 정신을 깨워주었다. 차가운 공기와 따스한 물이 감미로운 이중주가 되어 내 몸을 감쌌다. 조금 더 어두워지니 별빛이 아스라이 보이기 시작했다. 점점 몽롱해졌다. 밤새 그렇게 있으라고해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좋겠고, 하얀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면 더 좋을 것 같았다. 숨죽이고 있던 야성(野性)이 들먹거렸다. 며칠 있으면 돌아갈 캐나다에도 이런 장소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감성을 만져주는 살가운 곳이 고국에는 많은 반면, 캐나다는 다소 무뚝뚝한 분위기라는 아쉬움을 가지고 있던 터였다.
그 이듬해, 토론토 근교에 있는 시골로 이사오면서 레노베이션을 해야했다. 기둥만 남기고 거의 새로 지을 정도의 큰 공사였다. 설계하는 분에게 간직하고 있던 의견을 조심스럽게 내놓았다. 뒷마당 데크 위에 욕조를 설치해 달라는 부탁을 하는데, 왠지 나를 좀 이상한 아줌마라고 여길 것 같아 말꼬리가 목구멍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상대방이 하지도 않은 질문에 얼른 대답을 갖다붙였다. “손주들이 놀러오면 물놀이 하게 해주려구요.”
어스름해지고 별이 조금씩 선명한 빛을 내기 시작할 무렵, 데크에 나가 욕조에 물을 채운다. 따스한 물 속에 들어가있노라니 하루를 보낸 몸이 노곤해진다. 마당 한 켠에 심기운 크담한 나무에서 휘어진 가지들이 욕조 위로 늘어져 있다. 하늘에 등을 대고 흔들리는 잎사귀들 사이로 달이 걸려있고 별들이 깜빡거리고 있다. 걷다가 고개를 젖히고 바라보았던 하늘처럼, 누워서 바라보는 하늘도, 달도, 별들도 나의 독백을 들어주는 좋은 상대가 되어준다. 그들과 교감하는 시간이다. 흐르던 시간이 고요함 속에 잠시 멈추어 있다. 사람 관계의 끈이 느슨해지면서 헐렁해진 공간에 자연을 들여놓는 나를 바라본다. 평온함이 이슬처럼 영혼을 적신다.
소리가 내면에 잠식되어 있음을 알아차린다. 했어야만 했던 말, 침 한번 꿀꺽 삼키고 넘겼던 순간들, 안들었으면 오히려 좋았을 이야기들. 공허함을 담고 있는 수군거림이다. 그러나 여유가 찾아든 마음에게는 별 것 아닌 게 되어버린다. 비워내기로 한다. 비움은 연약한 듯 보이고, 결핍된 것 같기도 하지만, 때로는 신선한 회복의 힘을 지닌다.
이 밤이 지나면 내일이 시작되리라.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고, 오늘과 다름없이 쳇바퀴처럼 돌아갈 수도 있는 빈 도화지같은 날이. 별 기대없이 무심하게 아침을 맞이하게 될거고, 좋아하는 것에 적당히 마음을 내어주며 하루를 보내게 되리라. 달이 아까보다 더 기울어져 저만치 자리를 옮겼고, 별들은 조금더 밝은 빛을 머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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