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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라는 힘
김외숙의 문학카페
-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public@koreatimes.net)
- Aug 17 2026 01:18 PM
기후 변화로 온 세상이 난리다.
40도가 넘는 더위로, 산불로, 폭우로, 다양한 자연 현상으로 인한 피해와 불편이 여간 아니다.
해마다 에어컨 없이도 아무 지장 없이 여름 나던 영국에 사는 동생은 설마 잠시 이러다 말겠지, 하다가 폭염에 고생 중이고, 서울에 사는 여학교 친구는 남편 산소에 둘 생화 한 다발 사러 갔다가 열에 달궈진 돌 화병에 꽂아봐야 금방 익어버린다는 꽃집 주인의 말에 특수처리한 마른 꽃을 사다가 꽂아두고 왔다고 했다.
‘첨이다, 이런 더위!’
사람을 아주 무기력하고 기분 나쁘게 하는 지독한 더위라고, 친구가 서울의 40도를 설명했다.
나나 내 친구들은 실은 웬만한 더위나 추위에 좀 익숙한 편이다.
대구에서 여학교 다닐 때의 경험 때문인데, 분지인 대구의 겨울은 살갗이 따갑도록 매섭게 추웠고, 여름엔 가마 같았으니 이름조차 대프리카란 말이 있었다.
여름에 흰 운동화 신고 아스팔트 길 걸으면, 더위에 물러진 찐득한 검은 타르가 신발에 쩍쩍 달라붙었었다.
서울에 사는 가족이나 친구가 더위에 시달리면 나는 미안하다. 여름 기온이 서울보다 대체로 낮은 편이고, 캐나다에 온 이래로 처음 겪은, 올여름 나이아가라 지역의 온도 36도도 만만찮은 숫자이지만 서울의 40도보다는 낮은 숫자여서 나만 시원하게 사는 것, 같기 때문이다. 실은 여름을 좋아하지 않는 내게 36도는 서울의 40도와 같은 의미다.
며칠 36도까지 올라간 적 있는 나이아가라 지역에 어느 날부터 구름도 안개도 아닌 뭔가가 사방을 덮더니 매캐한 냄새가 났는데 알고 보니 자동차로 9시간도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난 산불 때문이었다. 서울에 사는 가족과 친구들이 이 더위에 불이 크게 났다는 소식 듣고 우리 집은 괜찮은가 하고 전화했는데, 하늘이 큰비 내리기를 기다릴 뿐이라고 대답했다.
언스플래쉬
그렇게 간절히 기다린 비가 불이 나지도 않은 나이아가라 주변에 집중 폭우로 쏟아진 탓에 이번엔 물난리가 났다. 나이아가라와 생 캐트린 지역이 폭우로 하수구 물이 역류해 수많은 집 베이스먼트가 침수되고 내 친구네는 한번 침수되어 청소하고 말리던 중에 다시 폭우가 와 다시 침수되는 이중고를 겪었다.
3년 전 폭우로 우리 집 서재에도 물이 들어 책과 씨름한 적이 있었다.
서재엔 남편 책, 오천 권이 듀이 시스템(듀이 십진 분류법)으로 진열되어 있었다.
듀이 시스템은 1876년 미국의 사서, 멜빌 듀이(Melvil Dewey)가 고안한 세계 공통의 도서분류
체계로, 책을 쉽게 찾고 관리할 수 있게 만든 대표적인 도서 분류 시스템이다. (Google참고)
책 오천 권은 책장마다 붙여진 일련번호에 따라 주제 또는 장르를 달리하여 제각기 다른 책꽂이에 꽂혀 있고, 모든 책의 위치는 그의 컴퓨터에 입력된 책장의 일련번호를 통해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인부들이 책꽂이에서 뽑아 박스에 넣는 순간부터 듀이 시스템을 벗어난 책들은 다시는 제자리에, 같은 일련번호에 꽂힐 수 없게 되었고, 이미 자기 자리를 벗어난 수백 박스의 책은 주차장에서 내 키보다 높았다.
기억력을 잃어가던 남편이 그 책들을 다시 제자리에 꽂아야 한다고 했을 때, 청소회사에서 나온 책임자는 이 책을 다 버리는데 드는 돈이 2.400불이라고 했다.
2.400불이라는 돈도 돈이지만, 평생 공부한 책, 내가 좋아하는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즈의 모든 작품을 포함한 문학 서적과 함께,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설교를 위한 책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수백 박스를 제 자리에 꽂지도 못하고 대책 없이 주차장에다 둘 수도 없었다.
다시 제자리에 꽂을 수도, 버릴 수도 없던 책을 머릿속에다 이고 고심하고 있었을 때, 크리스천 단체에서 ‘지금도 책 못사는 신학생과 목회자들이 많아요. 오천 권은 멋진 성탄 선물이 될 겁니다,’ 라며 U Haul 트럭을 몰고 왔었다.
남 돕는 일에 평생 앞서서 일했으면서도 책은 나눌 마음 없던 남편에게 ‘당신 책으로 많은 신학생과 목회자들이 공부하고, 당신 대신 하나님 일을 할 것’이라고 설득했더니 그때야 ‘책 다 보내라.’는 명령이 떨어졌으니, 오천 권은 지금쯤 신학생 또는 목회자의 손에 가 읽히고 있을 것이다.
더위에 시달리느라 웃을 일이 없다던 친구에게서 보이스 톡이 왔다. 이번엔 기쁜 소식이라며 입 가득 함박웃음을 물고 있었다.
‘입추 따라 드디어 서늘한 바람이 왔어. 기쁘지, 너도? 이 기쁜 소식을 네게 먼저 전하고 싶었어.’
서늘한 바람이 하도 반가워서 저 바람, 어디다 좀 담아두고 두고두고 조금씩 쐬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더위가 기분을 나쁘게 한다던 친구가 목덜미를 스쳤을 서늘한 바람 한 점에 마음을 바꾼 것이다.
‘그 바람, 캐나다에도 좀 보내봐.’라며 함께 깔깔 웃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의 그 지경에도 잠시 웃었으니, 집마다 마구 만들어내고 있었을 에어컨 바람이 아닌, 입추 타고 왔을 서늘한 바람 한 점 때문이었다.
자연의 힘 앞에서 사람은 무력하다. 그러나 힘으로 감당이 안 될 때, 사람은 다른 힘을 발휘한다. 비록 바람 한 점일지라도 기쁜 소식으로 해석하고 누릴 줄 아는 바로, 정신적 여유의 힘이다.

소설가 김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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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public@koreatimes.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