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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겹을 품은 오래된 사진
황현수의 들은 풍월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Sep 03 2026 12:01 PM
이문세는 1983년 명지대학교 재학 중, 개그맨 전유성의 눈에 띄어 당시 최고의 청소년 프로그램이었던 MBC <영 11>의 MC로 뽑혀 특유의 툭툭 던지는 재치와 유쾌한 입담으로 인기를 얻는다. 1984년경 나는 <MBC가이드>에 <영스타즈>의 홍보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이문세를 처음 보았다. 여의도 사원 식당의 한 공간에서 <영 11> 대학생 보조 출연자였던 <영스타즈>와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연습하던 20대 초반의 풋풋한 모습이 어렴풋하다. 그러니까 그는 가수로 알려지기 전부터 안방극장에는 벌써 친숙한 얼굴이었다.
데뷔곡, ‘나는 행복한 사람’을 발표하며 가수로서 발을 내디뎠지만, 대중들은 그를 말 잘하는 MC로 대했다. 이미지도 바꾸고 싶고, 후속곡을 써 줄 자기 색에 맞는 작곡가를 찾고 있었다.
1984년 가을, 당시 무명 작곡가였던 이영훈은 <신촌블루스>의 엄인호 스튜디오에서 음악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때 이문세가 우연히 엄인호에게 들렸고 거기서 이영훈을 처음 만난다. 그와의 만남은 허기진 말이 수확을 앞둔 홍당무 밭을 통째로 마주한 것과 같은 음악적 충격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가창력을 지닌 가수라도 자신의 영혼에 맞는 옷을 입지 못하면 빛을 발하기 어려운 법이다. 바람에 실려 온 우연이라는 씨앗이 비옥한 마음에 푸른 싹을 틔우게 된다.
두 사람은 세월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 명작의 서사를 써 내려갔다. ‘난 아직 모르잖아요’, ‘소녀’, ‘사랑이 지나가면’, ‘광화문 연가’,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붉은 노을’, ‘옛사랑’ 등 주옥같은 곡들을 함께 만들어 낸다.
40여 년 이상 활동한 가수들 중에도 히트곡 20개 이상을 가지고 있는 가수는 손에 꼽는다. 조용필, 이미자, 나훈아, 송창식, 양희은 그리고 이문세 정도라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이들을 ‘전설’이라 말한다. 어떤 이는 이문세가 ‘전설’에 포함되기에는 2% 정도 모자란다고 하는데, 이영훈과 함께 만든 곡을 들어보면 그런 ‘토’를 달 수 없다.

가수 이문세와 작곡가 이영훈은 완벽한 호흡으로 세월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 명곡을 만들며, 팬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되는 둘만의 사진을 남긴다. tvN 캡처
그의 곡은 독특하고 서정적인 선율에 클래식과 대중음악이 절묘하게 녹아 있다. 대중적이면서도 감미로운 목소리를 가진 이문세에게 이영훈은 맞춘 듯 편안한 선율을 지어준다. 두 사람은 음악 작업 초기부터 엄청난 완벽 주의자였다. 이영훈은 멜로디뿐만 아니라 가사 한 글자, 조사 하나까지도 곡의 정서에 맞아야 하는 섬세한 성격이었다. 이 때문에 이문세가 노래를 녹음할 때 조금이라도 감정을 흐트러뜨리면 바로 ‘다시’를 외쳤고, 이로 인해 다투는 일도 많았다. 하지만, 이런 치열함 덕분에 수많은 명곡들이 탄생할 수 있었지 싶다.
주변 지인들의 말에 의하면 이문세는 유쾌하고 활달했고, 이영훈은 감수성이 예민하고 섬세한 스타일이었다. 평소 성격이나 취향은 달라서 사석에서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지만, 피아노 앞에 앉아 음악 이야기를 할 때면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영혼이 통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1990년대 초반에 각자 개인적으로 해보고 싶은 음악적 시도를 하기 위해 협업을 멈추고 각자의 길을 걷는다. 그때 이문세가 새로 찾은 작곡가가 유정연이다.
유정연은 1965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고, 정통 클래식을 깊이 연주하며 학창 시절을 보낸다. 한때 KBS 교향악단 단원으로 활동했으나, 클래식 무대에 머무르지 않고 대중음악과 재즈, 라틴 음악 등 폭넓은 장르로 시선을 넓힌다.
다양한 음악 세계를 접하며 쌓은 탄탄한 화성학과 연주 경험으로 세련된 바이올린 편곡과 이국적인 감성의 멜로디를 만들어냈다. 그를 만난 이문세는 골동품점의 낡은 고서화 속에서 국보급 서화를 찾은 듯 기뻤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이 1993년 이문세가 발표한 ‘오래된 사진처럼’이다. 직접 가사를 쓰고 유정연과 함께 곡을 붙였다. 그동안 이영훈에게는 감히 곡을 수정하자고 하지 못했지만, 이번은 자신의 색으로 덧 칠을 했다.
“모든 것들이 변해 가듯이/ 너와 함께 했던 순간들도/ 오래된 사진처럼 기억 속에 묻혀 버리고/ 희미하게 하나 둘씩 아주 천천히 바래져만 가네/ 멈출 수 없는 시간들 아쉬워했던 우리들/ 이제는 서로 다른 곳에 서 있는 걸/ 이미 너무나 먼 곳에”
이문세 특유의 따뜻함을 담아 재즈 발라드 풍의 감정을 노래에 토해냈다. 그러나 전작들에 비해 폭발적인 신드롬은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이문세라는 탄탄한 팬 덤과 대중적 신뢰를 바탕으로 안정적인 판매고를 기록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1993년 이문세가 이영훈의 울타리를 벗어나 발표한 ‘오래된 사진처럼’의 작곡가 유정연. LinkedIn
이 곡으로 ‘이문세가 1980년대의 풋풋하고 서정적인 소년의 이미지에서 한층 더 깊고 성숙해진 연륜과 절제된 창법이 돋보인다’는 평을 받는다. 이영훈이라는 거대한 울타리에서 벗어나 어떤 장르와 작곡가를 만나든 자신의 색깔로 소화해 내는 분기점이 된다.
‘오래된 사진처럼’으로 이름을 알린 유정연은 이상우, 장혜진, 핑클, 백지영, 신승훈 등과 수많은 명곡을 탄생시키며 히트 작곡가로 활동한다. 그러다가 브라질 음악과 탱고 음악에 심취해 오랜 기간 아르헨티나와 프랑스 등지에서 안토니오 유(Antonio Yoo)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다가 2021년경에 고국으로 돌아온다.
이문세는 ‘오래된 사진처럼’ 후에도 김현철, 장기호 등과 작업을 하며 홀로서기를 하였고 자연히 이영훈과는 발걸음이 뜸해진다. 바쁜 세월 속에 다시 마주할 기회를 놓치는 듯했으나, 2008년 이문세가 투병 중이던 이영훈의 병상을 찾아가 손을 맞잡고 그간의 모든 어긋남을 녹여낸 진심 어린 화해를 하였다. 이영훈은 대장암으로 47년간의 세상살이를 접었지만,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깊은 우정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누구에게나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세월의 겹을 품은 오래된 사진이 있다. 흘러간 시간과 그 시절의 기억을 되짚어 보는 그 사진들도 이제 정리해야 할 숙제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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