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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해 줬더니 되레 함부로 대해” 우울감

정중한 거절 연습이 필요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Sep 13 2026 02:27 PM

귀한 사람으로 대접받는 법


서른 중반의 회사원이 진료실을 찾아왔다. 우울하고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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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게 살면 복이 온다고 배웠건만 현실에선 착할수록 만만해지는 일이 생각보다 많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일러스트=신동준 기자

 

사연을 들어 보니 그는 사무실에서 제일 착한 사람이었다. 동료의 급한 부탁을 거절해 본 적이 없고, 회식 메뉴를 정할 때면 언제나 "저는 아무거나 괜찮아요"였고, 분위기가 어색해지면 자신을 깎아내리는 농담으로 웃음을 만들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상했다. 후배들은 그의 업무 요청을 뒷전으로 미뤘고, 상사는 궂은일만 그에게 맡겼다. 회의에서 그의 의견은 아무도 묻지 않았고, 어렵게 꺼낸 부탁은 가볍게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몇 해를 지내다 몸과 마음이 먼저 지쳐 버린 것이다. 그가 물었다. "선생님, 저는 정말 잘해 줬거든요. 그런데 왜 다들 저를 함부로 대할까요."
 


거절 힘들어 베푼 선의가 약점으로

착하게 살면 복이 온다고 배웠지만, 인간관계에서는 착할수록 만만해지는 일이 생각보다 많다. 고백하자면 나도 자주 당하는 편이다. 거절에 서툴러 한참을 끙끙대다가, 연락처를 지우지는 못하고 이름 옆에 슬쩍 '무례파'라고 적어 두는 것이 나의 소심한 복수다.

심리학자 크레이그 파크스 연구진이 2010년에 내놓은 실험이 있다. 사람들은 팀 과제에서 남들보다 많이 일하고 적게 가져가는 사람, 그러니까 제일 이타적인 구성원을 오히려 집단에서 쫓아내고 싶어 하더라는 것이다. 이유를 물으니 저 사람 때문에 기준이 높아진다, 혼자 규칙을 어긴다고 답했다고 한다. 착한 사람이 손해 보는 것은 기분 탓만이 아닌 셈이다. 물론 절반쯤은 자신이 자초한 일인 경우도 많다. 호의가 반복되면 권리가 된다는 오래된 농담처럼, 나는 선의로 한 일인데 상대는 어느 순간 그것을 당연한 몫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를 써먹을 기회로 여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첫째, 다 받아 주기 때문이다. 선 없이 요청을 받아 주다 보면 상대는 나를 한 사람의 인격이 아니라 자기 편의를 위한 도구나 배경쯤으로 인식한다. 경계 없는 수용은 무례를 허락하는 초대장이 된다. 묘한 것은 이것이 꼭 상대의 인성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요구는 거절하지 않는 사람에게로 모인다.

둘째, 친절이 습관이 되기 때문이다. 한계효용의 법칙은 마음에도 적용된다. 반복해 베푸는 호의는 갈수록 값이 떨어지고, 상대는 그것이 나의 노력이라는 사실조차 잊는다. 노력 없이 얻은 친절을 사람은 귀하게 다루지 않는다. 정반대의 일화도 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자신을 미워하던 정적에게 오히려 귀한 책을 빌려 달라고 청했다. 책을 빌려준 정적은 그때부터 이상하게 그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그가 세상을 뜰 때까지 친구로 지냈다. 사람은 자기에게 잘해 준 사람보다 자기가 호의를 베푼 상대를 좋아하게 된다는, 뼈아픈 심리학이다. 퍼주는 쪽이 아니라 청할 줄 아는 쪽이 관계의 주도권을 쥔다는 말이다.

셋째, 갈등이 두렵기 때문이다. 싫다고 말하면 분위기가 험해질 것 같아 그냥 내가 하고 만다. 그런데 찔렀는데 아픈 척도 않고 웃어 주면 상대는 한 번 더 찌르게 마련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만만한 상대에게 함부로 구는 것은 인간의 바닥에 깔린 동물적 본능인 듯하다.
 


타인만을 위하는 배려와 겸손은 독

그래서 이런 분들을 만나면 스스로를 어떻게 대접하고 있는지부터 함께 점검한다. 무시당하는 사람들의 태도에는 공통점이 있다. 필요 이상으로 미안해하고, 말끝을 흐리고, 눈치를 본다. 에너지가 센 사람들은 그 약한 신호를 놀랄 만큼 빨리 읽어 낸다. "저는 아무거나요"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은 배려심 많은 사람이 아니라 주관 없는 사람으로 분류되고, 세 번째부터는 아예 의견을 묻지 않는다. 결정에서 소외되는 것이다. 자기 비하 유머도 마찬가지다. 한두 번은 겸손하고 친근하게 들리지만, 반복되면 사람들은 정말로 그 농담대로 나를 무시한다. 2,300년 전에 맹자가 이미 적어 두었다.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를 업신여긴 뒤에야 남이 그를 업신여긴다고.

반대로 뭘 해도 존중받는 사람이 있다. 목소리가 크거나 무서운 사람이 아니다. 가만히 있어도 함부로 하기 어려운, 내면이 단단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기 기준이 분명하고 일관된다.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범위를 알고, 안 되는 일에는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한다. 판단의 기준도 밖에 있지 않다. 타인의 평가는 애초에 내가 조절할 영역이 아님을 알기에 비난에도 칭찬에도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그 여유가 남들 눈에는 함부로 할 수 없는 아우라로 보인다. 무엇보다 스스로를 귀하게 여긴다. 자기 시간과 건강과 감정을 아무 데나 헐값에 내놓지 않는다. 그런 사람 옆에 서면 이상하게 나도 말과 행동이 조심스러워진다.
 


거절·행동·침묵으로 내 가치 지키기

그렇다면 무엇을 연습해야 할까. 첫째, 정중한 거절이다. 애니메이션 짱구의 원로 성우가 방송에서 털어놓은 일화가 있다. 집요한 방문 판매원을 차마 거절하지 못해 인터폰에 대고 짱구 목소리로 "지금 엄마 없는데요" 하고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웃고 넘길 일이 아니다. 평생 남을 웃겨 온 사람에게도 거절 한마디가 그토록 어렵다는 뜻이다. 거절은 관계를 끊는 행위가 아니라 관계를 지키는 행위다. 마음에 없는 승낙은 상대 모르게 내 쪽에서 거리를 만들고, 애매하게 끌다 하는 거절은 상대에게 앙심을 남긴다. "지금은 곤란합니다", "그건 제 생각과 달라 못 하겠습니다"라고 짧고 분명하게, 대신 감정은 싣지 않는 편이 서로에게 깨끗하다. 잊지 말 것 하나. 거절했다고 상대에게 빚진 것이 아니다. 못 하는 것을 못 한다고 말했을 뿐이다. 거절이 사람의 격을 깎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남명 조식은 쉰다섯에 내려온 단성현감 자리를 사양하며 상소를 올렸다. 대비를 궁중의 한 과부라, 임금을 선왕의 외로운 후사라 적은 글이었다. 목이 달아날 만한 문장이었지만, 그 거절은 그의 이름을 조금도 가볍게 만들지 않았다. 조정은 그를 더 어려워했고, 더 귀하게 여겼다.

둘째, 나의 가치를 행동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존중해 달라고 외치는 것은 소용이 없다. 맡은 일을 약속한 날짜에 해내는 사람, 자기 삶을 성실히 꾸리는 사람에게는 가만히 있어도 존중이 따라온다. 자기효능감은 입으로 쌓이지 않고 결과물로 쌓인다. 영화 '인턴'의 일흔 살 인턴 벤이 좋은 본보기다. 그는 존중해 달라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매일 정장을 갖춰 입고 제시간에 출근해 시키지 않은 일까지 말없이 해낼 뿐이다. 처음에 그를 장식품 취급하던 젊은 대표가 마지막에 가장 의지한 사람이 그였다.

셋째, 침묵의 힘이다. 무례한 말을 들었을 때 즉각 받아치지도, 어색하게 웃어넘기지도 말고 잔잔한 눈빛으로 상대를 삼 초쯤 바라보라. 화난 표정도, 항의의 말도 필요 없다. 사람은 진지한 눈빛을 생각보다 두려워한다. 그 조용한 3초가 "당신은 방금 나의 선을 넘었습니다"라는 말을 어떤 문장보다 강력하게 전달한다. 대개 그 순간 자신의 무례를 깨닫는다.

몇 달 뒤 그 회사원의 표정이 밝아져 있었다.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회식 자리에서 처음으로 먹고 싶은 메뉴를 말했고, 무리한 부탁 하나를 정중히 거절해 봤다고 했다.

"생각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던데요. 관계가 깨질까 봐 그렇게 겁이 났었는데, 요즘은 오히려 다들 제 의견을 먼저 물어봐요."

존중은 남이 나에게 베푸는 선물이 아니다. 내가 나를 대하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내가 나를 귀하게 대접하기 시작하면, 세상도 그제야 나를 귀하게 대접하기 시작한다.


한창수 고려대 구로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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