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협회 천 년의 시간이 지나고

가정의는 나를 전문의에게 보내며 종이에 urgent라고 썼다. 긴급하다는 단어를 보는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얼마 전 초음파를 한 결과, 두 군데가 아주 안 좋게 나왔다고 했다. 며칠 되지 않아 각기 다른 분야의 전문의가 나를 불렀다. 그들로부터 걱정과 위로가 섞여있는 반응을 감지하면서 조직검사와 CT촬영을 했다.나쁜 결과가 나올 것을 예상하면서 기다리는 시간은 막상 나쁜 결과를 받고 난 후보다 더 힘이 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보내는 시간은 안개가 자욱한 허공을 허우적거리는 것 같았다. 부정적인 쪽으로 마...

문인협회 그림 속의 삶

1首게와 소와 감과 아이잠 깬 새벽, 그림 밴드를 보다가더 깊이 들어간 곳에 그가 있었다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너희는 저 푸른 바다, 하얀 백사장삐뚤게 걷지 말고 똑바로 걸으레이우직하고도 유순해서슬픈 동물,그래서 피 묻은 머리로치받고 치뜨야 한다그래서 이겨 살아남아야 한데이푸른 파도 망망한 해변게를 집어 들고 소 끄는 수레에 얹혀길 떠나는 가족헤어지는 가족포연(砲煙)이 앗아간 아픔어머님 생각북에 두고 온 혼자 살으라고떠나 보낸 어머님 생각빨갛게 익어 감이 떨어지고마당에 떨어진 감을 아이는 주워 든다무중력의 삶을 떠돌다배고프...

문인협회 얼음땡 놀이

외국 영화에서 괴한이 총을 들고 Freeze!라고 소리치는 장면을 보며 얼음땡 놀이가 생각나 결정적인 순간에 피식 웃었던 적이 있다. 얼음땡 놀이는 술래가 잡으려는 순간 얼음을 외치고 움직이지 않으면 위기를 모면하고, 술래가 아닌 사람이 와서 땡하며 건드려주면 다시 움직일 수 있는 놀이이다. 전대미문의 팬데믹 사태로 정상적인 생활의 틀이 깨어지고 있는 요즘, 얼음땡 놀이가 다시 생각났다. stay home, 집에만 있으려니 얼음에 갇혀있는 기분이었다. 내일도 오늘과 똑같은 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기대감이 결여된 일상은 지루하고 답답...

문인협회 낯선 일탈

몇 년 전에 교통사고로 차가 부서지던 날부터 나는 뚜벅이가 되었다. 마침 직장 근처로 집을 옮기게 되어서 차를 없애기로 한 것이다. 나의 다리와 친해져야 할 운명이니 그 기념으로 토론토 북쪽인 핀치에서 남쪽 끝 하버 프런트까지 20km를 걷기로 작심했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고 걸었다. 몸을 가볍게 하고 걸어야 한다는 생각에 아무것도 먹지 않고 세 시간을 걷다가 음식을 사 먹은 것이 화근이었다. 먹고 나니 몸이 노곤해지는 바람에 움직일 수 없이 피곤이 밀려와서 전철을 타고 집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그때 나는 몇 킬로미...

문인협회 유월의 귀촉도歸蜀道

1首춘향의 단오풍정(端午風情)향단아 내 그네를 하늘 힘껏 밀어다오춘풍에 치맛자락 한양 서방 가 닿도록꿈에도 보고픈 낭군 어사화로 올련가보리밭 출렁이고 버들잎 윤(潤) 오를 때월매 딸 보듬어서 사랑 뭔지 알게 했지오늘도 그네에 올라 망부석이 되려오내게도 설레이는 오월 단오 찾아오면내 낭군 사랑 눈뜬 광한루로 나서보리곱씻은 노랑꽃창포(菖蒲)* 붓꽃** 무릎 베려니* : 단옷날 여인네는 창포에 머리를 감는다고 해서, 노랑꽃창포를 춘향에 은유적으로 빗대어 표현함.** : 붓꽃이 붓처럼 꽃이 피므로, 한양에 과거(科擧)보러 간 몽룡을 은유적...

문인협회 못 해먹을 노릇

밴쿠버에서 로키 산맥을 향해 올라가는 첫날은 버스 안에서 꼬박 8시간을 보내야 했다. 비슷비슷한 차창 밖 풍경이 지루해질 때쯤, 앞자리에 앉은 귀여운 꼬마와 눈이 마주쳤다. 꿀 떨어지는 눈빛을 보냈더니 수줍음과 장난기가 섞인 미소로 알은체했다. 종일 버스를 타고 있으려니 저나 나나 심심하긴 마찬가지일 터. 눈빛 교환은 했으니 말이라도 붙여볼까 하다가 곁을 주지 않는 젊은 엄마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관심을 거두었다. 서먹한 사이에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 한마디면, 금세 마음의 빗장을 풀고 다가서던 시대는 지났나 보다. 사람들이...

문인협회 이름 뒤의 한 문장

지금까지 정말 잘 살아오셨어요. 가족 중에 한 사람한테 만이라도 진정한 존경을 받는다면 그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아버님한테는 적어도 제가 그 한 사람이에요. 막내 며느리의 고백을 들으며 멋쩍은 듯 왼쪽 손바닥으로 중풍을 맞아 마비된 오른 손등을 괜히 비벼대고 있었다. 더 늦으면 후회할 것 같아 꼭 하고 싶었던 말을 해야 할 듯싶었다.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아버님은 돌아가셨다.톨스토이의 이반일리치의 죽음을 읽으며 시아버지 생각을 했다. 남의 부러움을 온몸으로 받으며 판사로 승승장구하던 주인공 이반일리치의 인생이 ...

문인협회 도시(都市)의 풍경(風景)

도시(都市)의 풍경(風景)1首집없는 천사전봇대* 한대가 쓰러져 있다그 옆에 애자(碍子)**가 매달려 있다언제부터 쓰러졌을까아무도 모른다그 만 안다적어도 바람처럼에글린턴‧영 네거리에내 왔을 때부터그를 보았으니까근데 바람 부는 날부우 부우뭐라 뭐라소리를 낸다지나는 사람들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채지나친다아마도꿈결에일어서고 싶어~저 먼 어디론가신호음을 띄우고 싶어~소리치는 것 같다*: 집없는 천사(homeless man)**: 플란다스의 개(homeless mans companion dog)2首그 집 앞그 집 앞 봄이 고왔다오가며 들리는 화...

문인협회 5월 속에 있다

지나치면 그만인 순간도 한 장의 사진 속에선 특별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사진은 순간의 기록이지만, 사진을 보면 그 너머의 풍경까지 그려지기 때문이다. 라일락꽃 사진에서 꽃향기를 맡고, 미풍의 간지럼을 느낀다. 더욱이 이 사진이 온라인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가면 보는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 나는 소셜 네트워크인 인스타그램에 꽃 사진을 올리며 한국과 미국에 있는 친지와 댓글이나 하트로 안부를 주고받고 있다.꽃향기가 느껴지는 5월, 바야흐로 봄. 화창한 햇살이 겨울의 흔적들을 지우고 있었다. 찬바람을 타고도 봄은 오고 있었다....

문인협회 봄의 뜨락에서 - 아우에게

하많던 근심들 땅으로 돌아가서너는 이제 가볍게 낙엽으로 내린다욕심의 찌꺼기 모두 부려놓고 수척해진 너의 몸은다만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낸다겨우내 날아온 이파리들 쓸다 보니잔디 사이로 단풍나무 씨앗들이 싹을 틔우고 있다나는 아직 지나간 날들도 품지못하는데너는 어느새 곱게 삭아서다음 生을 준비하고 있구나微笑처럼마음에 틔우는 방점 하나.

문인협회 인생 제 2막

세상은 봄을 맞을 준비가 한창인데, 로키 산에는 고요하게 포슬 눈이 내리고 있다. 활기찬 표정의 개들이 온 표면에 그려져 있는 미니 밴은 로키 산맥 정상을 향하여 가파른 눈길을 의연하게 올라가고 있다. 차가 목적지에 다다르자 수 십 마리의 울부짖음이 정적을 깨부순다. 그것은 거의 포효에 가깝다. 내가 탄 썰매를 조정해 줄 안내인 프란시스는 눈 위를 달리기 시작하면 조용해질 것이라며 다소 당황하고 있는 우리들을 안심시킨다. 다섯 마리의 개가 일렬로 줄에 묶인 채 내가 타고 있는 썰매 앞에 정렬하고 서 있다. 몸을 눕히고 담요를 목까지...

문인협회 봄꽃 소묘(素描)

1首- 처녀치마언 땅에 발이 시려 동동거려 피었구나.얼굴이 푸르둥둥 그래도 긴 치마라.녹는 땅 바치는 기도 치맛폭에 고여라. 2首- 복수초여느 꽃 시샘하듯 고슬한 땅 기지개 켜화원(花園)에 복 담으려 노랑 십자(十字) 수(繡) 놓았네.앞 다툰 상춘객(賞春客) 가슴 아련히도 떨려요.3首- 얼레지꽃부풀은 바람불어 남녘을 바랐더니화원도 흙 부풀어 화답(和答) 화신(花信) 보내오네.족두리 부끄런 신부 옷섶 가닥 여며요.4首- 제비꽃사립문 반쯤 열어 보고픈 님 오랬더니길 섶에 봄아기씨 앙징스런 걸음마래.아서라 오는 봄소식 뉘라 나서 막으랴...

문인협회 묵은 빚을 갚다

개그맨 유O석은 늘 착용하는 안경을 벗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웃게 만든다. 너무나 친숙한 표정이 사라지고 생판 다른 사람으로 느껴져 이상하고, 낯설어서 웃게 된다. 그만큼 안경의 유무가 인상에 주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요즘은 시력에 문제가 없어도 이미지 변신용으로 안경을 쓰기도 한다. 안경테의 모양과 색깔에 따라서도 얼굴 표정이 다르게 보이므로 안경점엔 수백 가지의 안경테가 구비되어 있다. 나는 황반변성이 있어서 해마다 눈검사를 받았고 안경의 도수를 바꿔야 했지만, 6년 전 한국에서 맞춰온 것을 그대로 사용해 왔다. 나만의 착각이겠...

문인협회 지나간 시간은 풍경이 되고

강물 풀리는 소리가 봄을 부를 즈음 고국에서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온 사람. 그녀는 어느 봄날 그렇게 나를 찾아왔다. 내가 캐나다에 살고 있다는 말에 서부 밴쿠버 어디쯤인 줄 알았는지, 미국 LA에 오는 김에 나를 만나고 가려했다나. 좀처럼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 추위 속에서도 그녀를 떠올리니 마음이 훈훈했다.먼 옛날 이야기이다. 그때 내가 서른 중반, 그녀는 스물을 접는 나이였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는 젊디 젊었었는데 교사라는 페르소나를 의식해서 그랬을까, 말이나 행동은 애늙은이 같았다. 틈만 나면 어두침침한 교무실을 벗어나 ...

문인협회 말을 해줘요, 리베카

왜 이리 반가운가?그때는 어색했는데,리베카30년전 항해일지를 꺼내지나쳤던 불빛이실은 등대였다고 고쳐쓴다하늘에 별을 그렸는데평생 단 한점의 그림만 팔 수 있었던 고흐시대가 바뀌고이제 반짝이는 큰 별이 됐지만,고독하게 떠나간 그 사내위로할 길이 없다누가 시대정신에게다름을 틀린 것이라 해도 된다고 했나?지금 옳다는 것의 수명은 얼마나 될까?내가 입고 있는 것은 구멍 숭숭난 갑옷유통기한 찍힌 상식이라는 포장지시간을 넘어선다는 것이 무엇인지말을 해줘요, 리베카*리베카 : 가수 양준일 1집 수록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