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동네 산책을 나섰다. 오늘은 흐린 하늘 아래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나무들이 바람 몸살을 앓고 있었다. 발코니 너머 늘씬한 단풍나무는 유연하게 이리저리 흔들리고, 뿌리 깊은 소나무는 든든하게 자리를 지킨다. 아카시아 역시 거친 바람 속에서도 뽑히지 않고 나름의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모습들을 보며, 나는 문득 젊은 날 온몸으로 맞섰던 수많은 바람을 떠올렸다.Chat GPT 생성 이미지제주 모슬포는 바람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바람이 너무 심해 못 살겠다, 못 살겠다 하다가 모슬포가 되었다는 원주민들의 이야기...
무거워진 다리로 숙소에 도착하니 뿌연 유리문 사이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11월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은 비가 많이 와서 대기가 습기로 빽빽했다. 순례자용 호스텔에 머무는 사람들 모두 머리부터 신발까지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실내에서 쏟아지는 비를 피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해 보였다. 주방에서 저녁을 만들고 있는데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이 두 명이 나타났다. 한 명은 머리를 허리까지 기른 키가 큰 남자였고 한 명은 총명한 눈빛을 가진 건강해 보이는 여자였다. 그 둘은 조용하고 신속하게 각자 맡은 요리를...
여성의 활동이 흔치 않던 시절에 나의 어머니는 자신의 일과 함께 그 분야의 학원을 운영했던 현대 여성이었다. 어머니가 늘 바쁘다보니 집안 살림은 가사도우미에게 의존해야 했고 육아는 외할머니의 몫이었다고 한다. 5남매 중 첫째 아이로 태어난 나는 거의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고 엄마보다 할머니를 더 좋아하며 따랐다고 한다. 잠시도 할머니 곁을 떨어지지 않으려했던 나는 6.25 사변 때 피난 지였던 외갓집에서 아예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하여 부모님 곁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나의 유년을 품어...
에메랄드 빛 바다는 투명하고, 은빛 모래사장은 눈부시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야말로 낙원과도 같다. 십여 일째 이곳 카리브해 휴양지에서 머물며 나는 오직 내가 원하는 것만 하며 지냈다. 시간의 흐름조차 잊을 정도로.Adobe Stock처음 며칠은 만족 그 자체였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일정도 없었고, 책임도 없었으며, 해야 할 일도 없었다. 아침에는 느지막이 일어나 산해진미가 차려진 뷔페식당에서 브런치를 하고, 낮에는 그늘에서 원하는 책을 실컷 읽으면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저녁이면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분위기 있는 식사를...
나는 늘 1.1을 준비하며 살았다. 완전한 1에, 존재감 없는 0.1을 더하는 일. 그 작은 여유가 묘하게도 삶에 여유와 자신감을 주었다.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은 그 느낌이 더 강렬했다. 필요한 것의 두 배를 준비하는 것은 내 깜냥을 넘어서는 일이었지만 1.1 정도라면 해볼 만했다. 1이라는 숫자는 그 자체로도 이미 완전하고 충분하다. 그런데도 그 옆에 덤처럼 붙는 0.1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안겨주었다. 일러스트=AI 생성 이미지(ChatGPT)다음 날로 예정된 연구 수업 준비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순간이었다. 노트 한쪽...
올 봄 날씨가 심상치 않다. 꽃을 보고 싶은 마음에 지난 달 서둘러 모종판에 씨를 뿌리고, 빅토리아 데이가 지나면 땅에 옮겨 심으려고 준비해 놓고 있는 참이다. 이제나 저제나 기온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리며 매일 들여다 보아도, 싹은 고개조차 내밀지를 않는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5월이 이상 저온으로 잔뜩 움츠리고 있다. 60년 만에 찾아온 현상이라고 한다.Adobe Stock몇 년 전, 이사온 집은 정원을 가꿀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땅이 척박했다. 잡초가 무성한 앞마당엔 유난히 자갈돌이 많았다. 작년에 햇볕이 좋은 ...
후드득, 참새 여남은 마리가 나무 위로 날아올랐다. 무심코 걷고 있던 내 의식 속에 갑자기 참새가 들어왔다. 그러면서 그 옛날 하얀 겨울, 집 앞 감나무에 참새 떼들이 까맣게 내려와 앉던 기억이 떠올랐다. 기억은 재빠르게 연상작용을 불러일으켜 어릴 적 동네 물방앗간이 항상 참새 떼들의 놀이터였던 것, 그리고 가을, 벼가 누렇게 익어 가면 농부들은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그래도 안심이 안 되어 논두렁에 서서 훠이훠이 손을 저으면서 참새 떼들을 쫓던 일까지 생각이 났다. 가을 들판은 참새들의 식당이나 다름없었지. 온갖 농작물이 널려 있었으...
노을 자락이 붉다. 찰나에 스러질 태양은 호수에 잠겨 머리끝만 간신히 내놓고 오늘치의 빛을 닫고 있다. 나는 이제 시각이 아닌, 청각으로 호수를 느낄 뿐이다. 붉은 기운이 어둠에 묻히는 이 장엄한 순간, 자잘한 검은 곤충이 무리 지어 눈앞에 몰려든다. 기세가 사뭇 맹렬하다. 손을 휘저어도 쉬이 흩어지지 않고 무지막지한 춤사위로 정신을 어지럽히는 하루살이들. 그들도 인간처럼 무리를 벗어나는 게 두려워서 저리 떼를 지어 다니는 것일까. 아니면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아 죽기 전에 할 일을 마쳐야 한다는 초조감에서 저럴까. 내일 새로 태어난...
어느 날 아침, 무심코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았다. 그 안에는 중년을 넘어서는 사내가 서 있었다. 멋지게 살고 싶다던 청년은 어디로 갔을까. 대신 삶에 별 흥미도 없어 보이는 얼굴로, 그저 우두커니 서 있는 내가 있었다.도대체 왜 이렇게 생겼지?우울한 생각이 밀려오다 문득 이런 물음이 떠올랐다. 나를 불편하게 느끼는 나는 누구일까. 거울 속의 나인가, 아니면 거울을 바라보는 이쪽의 시선일까.Adobe Stock요즘 스마트폰은 전화기라기보다 검색기이자 작은 극장에 가깝다. 수돗물처럼 틀면 오락과 지식이 끝없이 흘러나온다. 운전할 때나...
오랜만에 온타리오 호숫가를 걷다가 벤치에 앉았다. 아마 지금쯤 온타리오의 북쪽 작은 호수들에서는 아비새 (Loon)들이 새끼들 하늘을 나는 연습을 시키는 시기일 것이다. 여기 험버 리버 (Humber River) 하류에 백조들이, 또 어미 오리가 새끼 오리들을 데리고 유유히 헤엄치고 놀 때 – 이 평화스러운 풍경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다. 호숫가에 나 혼자일 때, 나는 일상의 긴장을 풀고 자연의 순리와 평화로움을 즐기지만, 내 머릿속엔 많은 추억과 생각들이 오가기도 한다.토론토 에티엔 브륄레(Etienne Brule)...
아흔두 권의 책을 팔았다. 며칠간 내리던 비가 멈춘 풍경이 정겹고 푸르렀던 날, 첫 구매자를 만났다. 마흔일곱 권의 책을 구입한 그녀를 만나는 순간, 부끄럽게도 눈물이 흐른다고 느낀 건 정겨웠던 푸르름 때문이었으리라. 그녀가 구입한 마흔일곱 권에 선물 세 권을 더한 박스는 꽤 무거웠다. 다정한 인상의 그녀는 나의 책 하나하나를 쓰다듬으며 고마워했다. 한 권 $3.00에 살 수 있었던 물리적인 가격보다 귀한 책을 내놓은 내 결단에 더 고마웠으리라 짐작한다. 책을 받아 들고 차에 타려던 그녀가 문득 뒤돌아 내게 말했다.귀한 책 다 읽고...
찬바람이문틈으로새어들어온다.날씨가 스산하고 마음까지 가라앉는 날이면 그리움을품고 있는 노래를듣는다.손편지로마음을곡진하게나누었던친구만큼이나 속깊은곳을 만져주었던 홍하의골짜기, 메기의 추억,은발,스와니강...등 미국민요를 좋아했는데 나는 특히 은발을 좋아했었다. 가사 내용보다 부드러운 물결처럼 애잔하게 흐르는 가락에더 끌렸던 것 같다. 금빛사이에은색으로물든 연인의 머리카락을 보며 회한과격려를그린노래가 문득 떠오른 건, 그분들과의만남때문인지도모르겠다.Adobe Stock얼마전,지인 한 사람이 전화를했다.자신이다니는교회 시니어칼리지에있는자...
며칠 전 꿈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았다. 아니 느꼈다는 표현이 적절하리라. 꿈속에서는 사람의 형체를 본다기보다 느낌으로 그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건 아닐까. 지나온 꿈을 더듬어 보건대 아버지가 등장하는 꿈은 내 마음 상태가 불안정할 때 주로 꾸었던 것 같다.Adobe Stock어릴 적 우리 삼 남매는 아버지를 무서워했다. 군인이었던 아버지가 퇴근하고 돌아오는 시간이 되면 늘 불안했다. 통근버스가 동네 어귀에 들어서면 바깥에서 신나게 놀던 아이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자기 아버지에게 뛰어가 반갑게 안겼었다. 반면 우리는 곧장 집으로...
육중한 나무문을 열었다. 저 멀리 서 있던 어느 노승이 나에게 무어라 중국어로 외쳤다. 중국어를 모르는 나는 그것이 다시 나가라는 뜻인지 아니면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 몰라 멀뚱멀뚱 서 있기만 했다. 노승은 아랑곳하지 않고 중국어로 계속해서 나에게 외쳤다. 지나가던 사람 하나가 친절하게도 손을 소독하라는 뜻이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허둥지둥 손을 소독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노란 조끼를 입은 봉사자 두어 명은 기념품 판매대에 서서 무언가를 포장하느라 바빠 보였다. 절의 내벽은 작은 불상으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고 층층이 쌓인 불상들은 몇...
다 벗어던진 나무의 진실, 나목은 생명의 속살은 간직한 채 화려한 외장은 지웠다.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은 더 이상 떨어뜨릴 낙엽이 없는 듯 그 소리마저 공허하다. 낙엽은 어느 사이 자취를 감추고 마지막 잔존마저 잊혀졌다. 나목에 어울리지 않게 추위를 피해 보려 중무장의 방한복으로 걷는 나의 겨울 거리는 을씨년스럽다 못해 황량하기까지 하다. 모두 비우고 떠났는데 나는 아직도 비우지 못하고 삶의 끈을 붙잡고 있다니. 걸으면서 생각한다. 대화는 쉬 단절되고 이해와 용서는 멀리 있다. 마치 겨울 거리 만큼이나 인간의 일들은 겨울을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