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수의 들은 풍월 내 마음속 ‘수국 한송이’

옛 다이어리를 정리하다가 총각 시절에 법정스님을 뵈었던 기억이 떠 올랐다. 1983년 초여름, 알 수 없는 바람에 이끌려 혼자 전라남도 순천에 있는 송광사로 여행을 갔었다.흙먼지 날리는 비포장도로를 달려 시외버스가 송광사 주차장에 멈춘다. 열린 버스 문 사이로 짙은 흙 내음과 풀 비린내가 훅 끼쳐왔다. 주차장에서 송광사까지는 소나무 숲 속을 20여 분 정도 더 걸어야 했다. 황토와 굵은 모래가 뒤섞인 길을 걷는 동안 서걱거리는 소리가 정겨웠지만, 한편으론 돌아가야 할 막차 시간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주차장 근처에 민박집이 몇...

황현수의 들은 풍월 찬란했던 그 시절, ‘환상의 듀엣’

가끔, 함께 콘서트를 보러 다니는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번 4월에 나이아가라에서 <사이먼 가펑클(Simon Garfunkel)> 공연이 있는데, 부부 동반으로 같이 갈까?해서, 그런데, 사이먼과 가펑클은 벌써 헤어지지 않았나요?라고 되물었다. 그게, 실제 그들의 공연은 아니고, 두 사람의 음악 인생을 영화처럼 꾸민 콘서트 스타일의 쇼야 그래요! 봄나들이 겸 해서 가죠, 나이아가라 쌀국수 맛집도 들리고…사이먼과 가펑클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단짝이었다. 미국 뉴욕의 퀸즈(Queens)에서 자란, 둘은 19...

황현수의 들은 풍월 “그 상단(商團) 놈들은 아주 개차반이더군”

고국에 가면 잠을 설쳐, 해가 미처 뜨지도 않은 시간에 숙소 근처를 산책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던 중, 달빛의 끄트머리 사이로 택배 기사들이 물건을 나르는 모습을 보면서 참, 부지런히 열심히들 산다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내가 이민을 떠나기 전에는 보지 못했던 낯선 장면이다.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하루의 일상이 끝나는 늦은 밤. 내일 아침 반찬거리를 걱정하던 주부는 쿠팡 같은 쇼핑 플랫폼(Platfom)으로 먹거리를 주문한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문을 열면 주문한 식재료가 놓여 있다.이제 퇴근길에 무거운 짐을 들고 장을 보...

황현수의 들은 풍월 빛과 물이 빚어내는 ‘초록’

아들 녀석이 추워 밖에도 자주 못 나가는데…하며 수경 재배나 하라고 에어로가든(Aerogarden)을 사주었다. 그런데 몇 년 전 겨울, 두 달 정도 고국을 다녀왔더니 화분이 모두 말라비틀어져 버린 일이 있었다. 그 뒤부터 겨울에는 아예 식물 키울 생각을 접었는데… 솔직히, 처음에는 수경 재배가 인공 빛과 물로 식물을 키우는 것이라 별 흥미를 못 느꼈다. 그런데 막상 거실 한복판에 초록이 밀고 올라오는 모습을 보니 신기하고 마음이 따듯해지는 것이다.<에어로가든>에서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것은 바질...

황현수의 들은 풍월 동네 꼬마 녀석들, 추운 줄도 모르고...

도대체 그 연은 어디로 갔을까?하며, 며칠을 지하실과 창고를 찾아다녔다. 여보, 우리 이민 왔을 때 그, 스카버러 콘도에 걸려 있던 연, 기억나지? 하며 아내에게 물었다. 당신은 벌써 몇 번을 물어보네. 그 연, 없어진 지 오래됐다고 여러 번 말했는데…라고 한다.캐나다로 이민 오기 전이니까, 1998년 말이지 싶다. 한국 전통연(鳶)을 평생 연구한 노유상(盧裕相) 선생의 전시회에 갔었다. 서울 인사동 학고재 갤러리에서 <하늘을 수놓는 소망의 날개 짓>이라는 부제로 열린 전시회였다. 이 전시회는 단순한 민속품 ...

황현수의 들은 풍월 ‘여백의 시간’

지난해 12월 31일, 미국 뉴저지에 사는 친구가 연말 인사를 보내왔다. 2009년 달력이 아까워서 가지고 있었는데, 오늘 보니 2026년과 날짜, 요일이 같아 다시 걸어 놓았어. 새해 건강하자 라며 사진과 함께… 내가,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하며 답장을 했다.이 달력은 한국의 SK 그룹에서 만든 것으로, 중앙에 크게 역동적인 서체가 있고 주변에 작품의 유래와 설명 글이 적혀 있다. 해설이 전부 한자로 되어 있어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디자인이 유식해 보인다. 종이 재질은 고급 수채화 용지(아르쉬/Arches)를 사용...

황현수의 들은 풍월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연말이라 그런지, 창 밖의 빈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겨울 하늘을 보고 있으면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다. 그 호젓함을 채우듯, 흥얼거리는 노래가 있다. <낭만에 대하여>라는 노래인데, 앞부분은 잘 기억이 안 나고…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 만은/ 웬 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에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신기하게 이 구절만, 오래된 레코드판의 흉터에 바늘이 툭, 툭 걸린 것처럼 자꾸 제자리를 맴돈다.최백호가 부른 <낭만에 대하여>는 1995년 시청률 50%를 넘나들던...

황현수의 들은 풍월 ‘안녕하세요 변웅전입니다’

지난 11월 23일, 아나운서 출신인 변웅전(邊雄田) 전 국회의원이 향년 85세로 세상을 떠났다.나와는 직장 선후배로 만나 함께 근무했기에 그의 죽음은 남다르다. 1991년즈음, 나는 MBC에서 출판 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당시 변웅전 아나운서 국장으로부터 한번 보자고 연락이 왔다. 내가 이번에 자서전을 내려고 해요. 혹시, 좀 황현수씨가 도와줄 수 있을까 싶어서요 한다. 그때 방송에서 보던 그 깔끔하고 매끈한 외모와는 달리 소박하고 털털한 말투가 첫인상으로 남는다.변웅전은 1970~80년대 방송계를 주름잡았던 전설적인 어...

황현수의 들은 풍월 젠슨 황과 황창연 신부의 ‘변기 청소’

요즘 AI(인공지능)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테슬라>의 엘론 머스크, <오픈 AI>의 샘 알트만, <엔비디아>의 젠슨 황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젠슨 황은 한국에서 단연 존재감을 보여 주었다. 지난 10월, 한국 경주 APEC에서 글로벌 리더로서 기조연설을 했고, 각국 정상들과 개별 미팅을 주도하였다. 그뿐 만 아니라 삼성, 현대 총수들과 <깐부 치킨>에서 생맥주를 마시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생중계되며 그가 이 시대의 AI 리더 임을 널리 알린다.젠슨 황(Jensen Huang)은 중국 저장...

황현수의 들은 풍월 ‘고향의 맛’을 찾아간 식객(食客)

고국에 다녀왔다고 하니, 맛있는 거 많이 먹었어요?하는 질문을 많이 들었다. 고국을 찾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민 오기 전에 먹었던 진짜 깊은 맛이 그리워서이지 싶다.토론토에서는 해산물이 귀해, 고국에 가자마자 찾은 곳이 횟집이었다. 고급회를 파는 일식집이 아니고 수족관에 있는 생선을 바로잡아 막 회를 떠 주는 곳 말이다. 회와 함께 나오는 상추, 깻잎, 백김치, 김, 미역, 꼬시래기, 막장 등 쌈을 싸 먹게 곁들여 주는 해초류는 보기만 해도 입맛을 돋운다. 서비스로 나오는 새우, 고구마, 오징어 등의 튀김. 김치전과 꽁치 구이, ...

황현수의 들은 풍월 ‘좋은 축제는 많지만, 특별한 축제는 없다’

좋은 축제는 많지만, 특별한 축제는 없다이번 가을을 고국에서 보내고 왔다. 은퇴한 막내 동생이 강원도 횡성에 살고 있어서 그곳에서 며칠을 함께 했다. 형, 이 옆 홍천에 가서 전통 시장도 구경하고 좋은 절이 있는데 좀 걷다가 올까? 동생이 살고 있는 곳은 아침마다 호수에서 물안개가 피워 올라오는 경치 좋은 곳이지만, 횡성 군내에서도 20분이나 떨어진 외진 곳이다. 그래서 동생이 차를 태워 주기 전에는 꼼작 없이 갇혀 있어야 했다.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여서 좋지, 시장에 가서 점심도 먹자하며 따라 나섰다.고국의 가을에는 각 지역마다 ...

황현수의 들은 풍월 샌프란시스코의 ‘숨’과 ‘쉼’

한 달 보름 간의 긴 여행에서 돌아와 집 문을 여니, 고요하고 낯선 싸늘한 냉기가 밀려왔다. 손녀들의 여름 방학 기간에 맞춰, 미국 캘리포니아 산호세에서 지내다 왔다. 집을 비운 사이에 걱정스러운 것이 몇 가지 있었다.샌프란시스코의 골든 게이트 파크/Golden Gate Park 정원에서 만난 엔젤 트럼펫(Angel Trumpe)이라는 꽃으로 천사의 나팔이라 불린다.뒷마당 텃밭에 심어둔 고추와 깻잎, 부추에 물을 주지 못해 말라 버렸을 거라 생각했는데 다행히 무성하게 잘 자랐다. 집안에 있던 화분들은 아예 물 주기를 포기하고 마당 ...

황현수의 들은 풍월 길을 잃어야만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는 ‘여행의 맛’

나는 지금 손녀들이 살고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 산호세에 와 있다. 8월 초이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할 정도로 기온이 낮다. 오늘 아침 기온이 영상 12도, 뉴스에서는 61년 만에 찾아온 추운 여름으로 태평양에서 넘어온 구름이 하늘 가득해, 낮은 기온 현상이 나타났다는 설명이다.캘리포니아의 5번 고속도로를 따라 LA로 가노라니 이런 특이한 야산의 풍경을 자주 보게 된다.photograph by Wes Golomb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산호세까지 약 1시간 정도 오는 동안, 도심을 지나 바다를 건넌 뒤에는 누런 작은 야산들이 계속 이어...

황현수의 들은 풍월 시인 윤동주와 문재린 목사

2025년은 시인 윤동주가 세상을 떠난 지 80주년이 되는 해다. 고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그를 기리기 위한 다양한 추모 행사와 문화 프로그램이 기획, 진행되고 있다.윤동주는 어릴 때부터 별을 참 좋아했고, 예쁜 글을 썼다. 그는 1917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곳은 함경북도 출신 이민자들이 만든 한인촌이었다. 캐나다 선교사가 설립한 은진중학교를 다니다가,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편입한다. 하지만, 학교에서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운동을 펼치자, 뜻을 함께해 자퇴한다. 그 뒤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

황현수의 들은 풍월 반짝반짝 빛나는 ‘반딧불이’

여러 해 전, 늦여름에 온타리오의 땅끝 마을이라 불리는 포인트 펠리 국립공원(Point Pelee National Park)을 갔었다. 포인트 펠리는 캐나다 본토의 최남단에 있는 특별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하룻밤 캠핑을 했다. 이 나이에 웬 캠핑이냐?고 아내가 따라가기 전부터 투덜거렸지만, 이번 기회가 아니면 갈 수 없다는 공갈 반, 설득 반으로 꼬셔서 말이다.반딧불이는 축축한 곳을 좋아해서, 밤에 풀밭이나 숲 가장자리에서 조용히 기다리면 반짝이는 반딧불이를 만날 수 있다.마침 운이 좋아, 캠핑을 좋아하는 친구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