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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타 회담으로 전후 세계지도가 바뀌었다.
“세계서 가장 잔악한 군대 : 일본군들 “
-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public@koreatimes.net)
- May 19 2020 08:48 PM
소박 겸손한 트루먼 대통령직 이어 받아
6장 (상)
전국기자협회
워싱톤, DC 1945, 2.10 8:30 pm
Harry S. Truman (해리 S. 트루먼)
▲ 대담하게 피아노 위에 앉은 로렌 바콜이 건반에 손을 얹은 트루먼과 계속 눈을 맞추며 농담하고 있다. 75년전, 참 대담한 포즈였다.
트루먼이 피아노의자를 당겨 앉고 건반에 두 손을 놓자 장내를 메운 8백 여 군인들이 힘차게 박수를 보냈다. 기분이 풀어지는 토요일 밤. 소란한 장내는 담배냄새가 땀내와 섞여 코를 간지럽혔다. 트루먼 옆에는 마이크가 있어서 그는 농담도 하고 피아노도 연주할 수 있었다. 기자협 초청으로 참석한 육군과 해군 병사들은 맥주, 핫도그를 마음껏 먹으면서 쇼를 즐겼다. 유명인사들, 장성들, 정치인들은 군인들에게 음식과 드링크를 부지런히 날라다 주었다.
그러나 오늘의 사실상 주빈은 미주리주 출신 정치인. 부통령 트루먼을 잘 아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에 그에게 보내지 박수와 휘바람은 존경심과 동시에 호기심을 동반했다. 그러므로 트루먼은 피아노로 몇 곡을 치고 조크를 한 두개 날리면 된다. 정치연설은 전혀 불필요했다.
이날밤 주빈은 트루먼 외에 한 명의 여인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26세의 섹스심볼 로렌 바콜이 있었다. 영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헤밍웨이 원작)로 유명해진 바콜은 뭇 남성의 로망이었다. 참석자 전원이 남성들이어서 그에게 보내는 신호는 더욱 요란했다. 군위안공연 때 바콜이 험프리 보가트(후에 두 사람이 결혼함)에게 “휘파람 불 줄 알아요, 스티브? 입술을 물고 바람을 불어내는거에요, 요렇게”… 이 장면은 전국 남성들에게 깊이 각인됐었다. 그 주인공이 이날밤 나타났으니 젊은 군인들이 열광할 수 밖에.
트루먼은 마이크로 농담 한 마디를 던지고 건반 위에 손을 얹었다. 사실 어느 장소에서나 군중 사기를 올리려고 피아노를 치는 것은 트루먼의 장기요, 자랑이었다. 이런 모습은 끝없이 계속되는 정치연설의 지루함이나 상원의장(부통령으로서 역활)으로서의 딱딱하고 반복적인 역할, 매일 하오 5시 하원의장 샘 레이번과 어김없이 만나 버본 1잔을 마시는 약속보다는 백 배 즐거웠다.
트루먼은 3주전 루즈벨트대통령의 심장마비 사망 후 대통령직을 승계했으므로 이젠 대통령이었다. 루즈벨트는 재임시 한 번도 그와 독대한 적이 없었다. 그만큼 대통령으로부터 철저히 무시당했다. 그러나 트루먼은 절대로 이를 발설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가진 인격의 한 면이었다.
트루먼은 10세 때부터 피아노를 쳤고 베토벤이나 모짜르트 곡들은 악보가 별로 필요 없었다. 간혹 ‘미주리 왈츠’ 같은 초기 재즈풍 유행곡을 치면 사람들은 더 요란한 박수로 환호했다.
이날 하이힐에 무릎이 드러나는 스커트 차림의 바콜은 피아노 앞에 앉은 트루먼에게 다가가 몇 마디 농을 주고 받았다. 군인들이 그녀를 들어올려 업라이트 피아노에 높이 앉히자 박수가 더 높아졌다. 바콜은 다리를 꼬면서 요염한 다리를 과시했다. 40여 살의 차이가 있었지만 그는 트루먼에게 시종 눈을 주면서 유혹적으로 몸을 눕히곤 해서 분위기를 뜨겁게 고조시켰다.
사실 대담하기는 트루먼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황하거나 주저함이 없었다. 사진기자들의 플래쉬가 이런 기막힌 순간을 놓칠 수 없었다. 수많은 플래쉬에 바콜은 포즈를 바꾸어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우리나라에선 무슨 일도 일어날 수 있지요.”라고 한 장 교는 기자에게 감탄하듯 말했다. "그래요 무슨 일이든지.” 기자는 맞장구를 쳤다. 대통령이 피아노를 치고 배우가 다 리를 드러내고 앉아 농담한다. 민주적이요, 서민적이었다. 시골서 양복점을 하다가 미국의 두 번째 중요 정치인, 부통령으로 오른 트루먼은 원래 뼈까지 소박 겸손한 사람이었다.
▲ (왼쪽부터)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소련 공산당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은 1945년 2월 크림반도의 휴양도시 얄타에 모여 8일간 ‘외교 전쟁’을 벌였다. 2차 대전 종식후 세력권의 분할이었다.
앞으로 62일을 넘기지 못한다는 의사 선고를 받은 이 남자는 남은 일들을 빨리 끝마치려고 밀어붙였다. 그는 시들한 러시아의 햇살을 받으며 조용히 앉아 있었다. 검은색 케이프로 어깨를 감쌌으나 얼굴은 잿빛, 입술은 약간 푸른색이었다. 허파에서는 무슨 액체가 흘러나오는 상황이었다. 어느 모로 봐도 그는 심장병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환자였다.
그의 왼편에는 러시아의 조세프 스탈린이 앉았다. 오른 쪽에는 작고 살이 찐 영국 윈스톤 처칠 수상이 앉아서 쉴새 없이 뭔가 말하고 있었다. 루즈벨트는 골초답게 왼손에는 불 붙은 담배가 쥐어져 있다. 담배를 피우지는 않아도 습관적으로 들고있어야 하는 모양이었다. 찬스를 엿보는 사진기자들은 ‘3대 거물’ 회의 특종감으로 ‘손을 떨면서 담배를 입에 무는 대통령’을 렌즈에 담고자 했다. 루즈벨트는 그들의 생각을 알기 때문에 담배를 들고만 있었던 것이다. 손떨림은 벌써 수개월 째 계속된 일이었다.
▲ 미국의 용장 조지 S. 패튼 장군
흑해 속으로 삐져나온 크리미아 반도는 아침시간이었다. 스탈린의 얄타 별장에서 1주 내내 진행된 역사적 회의는 이날로 마감하고 각자 귀국할 참이었다. 이 회의에서 승리자는 스탈린이었다.
영국군은 벌지Bulge전투에서 나치독일의 마지막 대공세를 성공적으로 저지했다. 미국의 용감무쌍한 조지 S. 패튼 장군과 영국의 자만심 덩어리 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수가 이끄는 연합군은 이제는 독일 본토공격을 준비중이었다.
동쪽에선 러시아군이 폴란드, 헝가리, 체코를 포함, 나치가 점령했던 넓은 땅덩어리를 되찾았다. 이젠 미국, 영국, 소련은 아돌프 히틀러 목을 졸라서 무조건의 항복을 받아내면 4-5년을 끈 전쟁은 끝이다. 러시아군은 미국, 영국군보다 앞서 수도 베를린에서 불과 40마일 떨어진 곳까지 밀고 들어왔다.
▲ 영국의 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수
이런 상황에서 얄타회담은 전후 세계의 질서확립을 위해 열렸다. 말하자면 전리품 처분에 관한 논의였다. 그러나 회의가 2월4일로 결정되기도 전, 회담장소가 논의되던 때 러시아는 한 수 앞서 나갔다. 스탈린은 건강상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없다는 핑계를 내세워 러시아에서 만나자고 고집했다. 사실 그는 건강이 좋았지만 비행기 타는 것을 무서워했다. (*공산 지도자들의 특징? 김일성과 후손들도 비행기 공포가 있다)
이 때문에 살 날이 얼마 남지않음을 직감한 마음씨 고운 루즈벨트는 회의를 어디선가 빨리 마치고 싶었다. 그래서 얄타를 거부하지 않은 것이다. 건강이 점점 악화했지만 그는 배로, 또 비행기로 갈아타며 6천마일을 여행했다. 그게 끝이 아니라 회담장소까지는 차를 타고 8시간을 달려야 했다. 그의 방은 도청장치 투성이였고 시중드는 서버들은 스파이들이었다. 이외에 그의 크고 작은 움직임이 모두 녹화됨을 알기 때문에 루즈벨트는 심적으로 충분히 쉴 수가 없었다. 스탈린의 계획대로였다.
무자비한 소련독재자는 만일 이 회담에서 바라던 것을 얻는다면 그는 지구의 절반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목적은 분명했다. 소련연방의 경계를 19세기 제정 러시아 때의 영토 그대로 돌려받겠다는 것이었다. 소련군은 이때 발틱해 대부분을 지배하고 태평양 진출의 길목까지 나갔다. 그는 자기들이 점령한 땅, 예를 들면 폴란드나 헝가리 등을 돌려줄 의사가 없었다.
그러나 소련군이 아직도 건드리지 못한 중요한 땅이 있었다. 일본이 점령한 만주였다. 이때문에 루즈벨트는 소련군의 대일 선전포고를 촉구했을 때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스탈린이 바로 고대하던 요청이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일본공격을 기꺼이 수락했다. 단, 미국이 소련의 만주지배를 수락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그는 한반도를 적화한 다음 일본본토를 점령한다고 작정했다.
일본과 소련은 1904년 19개월간 만주에서 맞싸웠다. 세계의 예상을 뒤엎고 승자는 일본이었다. 이것은 히로히토 천황의 확장정책에서 초석이 됐다. (**일본의 소련에 대한 승리는 최근 역사상 동양국가가 서양국가를 패배시킨 첫 전쟁)
스탈린은 곧 일본에 복수, 한을 플겠다고 다짐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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