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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이스키는 소련·독립군 중위였다
제정러시아 때 입대 만주서 독립운동
- 캐나다 한국일보 (editorial@koreatimes.net)
- Oct 27 2023 03:33 PM
왕정 지지-레닌 공산당 지원-독립군-미군정 북한서 정보수집중 소련군 2명 살해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오른쪽)와 미소공동위원회 미국 수석대표 앨버트 브라운 소장. 하지는 소련군을 살해한 김경주를 소련 측에 넘길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제정帝政러시아군 중위 출신이자 독립군 간부였던 ‘카레이스키(고려인)’는 동료 한 명과 함께 남한에서 38선을 넘어 북한에 잠입했다. 정보수집 목적이었다. 그러나 실패로 그쳤고 인생은 새로운 소용돌이에 빠졌다.
이들은 북한 산속을 헤매다가 경계 근무중이던 소련병사 두 명을 격투 끝에 제압하고 무기를 탈취해 돌아오던 길에 운명의 장난인지 오히려 남한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체포됐다. 이때부터 사건의 진상과 신병 인도를 둘러싸고 미·소(美蘇) 군정 당국간에 줄다리기가 벌어졌다. 한반도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미소공동위원회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때였다.
이 이야기는 일제의 조선 침탈 직후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30여년 간 무장독립운동과 유랑생활을 거듭하던 어느 독립군의 통한의 기록이다.
I. 사건의 재구성
<한국 민간인의 소련군인 살해혐의에 관해서>
주한 미군사령부 방첩대 1946년7월21일 (극비)
주한미군 971방첩대(CIC)는 즉시 수사를 시작했다.
이에 관한 정보는 “A”부서의 만케(Mahnke) 중위 및 한국인 2명을 구금한 한국경찰로부터 전달받아 이들을 방첩대에 넘겨주었다.
사건의 주범은 김경주.
1894년생으로 49세이며 1905년 가족과 함께 소련으로 이주했던 고려인, 즉 ‘카레이스키’였다.
김은 이렇게 진술했다.
”1946년 7월6일 아침 친구와 함께 등산 중 폭우를 만났다. 비를 피할 곳을 찾다가 나무들 사이로 커다란 판잣집이 보였고 그 집은 빈 집 같았다.
우리가 그 집에 들어가보니 의외로 소련병사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들과 정면으로 마주쳤고 서로가 놀랐다. 나는 러시아말로 미안하다고 말하고 어떤 집을 찾고 있는데 어딘지 아느냐고 둘러댔다.
그러나 임기응변은 통하지 않았다.
러시아병사는 내 물음에 답하는 대신 “움직이지 말라”고 소리쳤다.
우리는 못 들은 척하면서 문 쪽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다른 한 명이 구석에 놓였던 총을 들어 겨누었다. 다른 한 명은 우리 몸을 수색했다.
나는 러시아말로 그들의 거친 태도를 불평하면서 말을 걸었다. 소총을 든 병사는 내가 못마땅했는지 내 쪽을 향해 총을 발사했고 총탄은 내 곁을 비켜 갔다. 바로 그때 내 친구가 총 든 군인 뒤로 다가가 총을 낚아채려 했고 둘 사이에 격투가 벌어졌다.
내몸을 수색을 하려던 병사가 몸싸움하는 전우를 돕기 위해 그에게 다가서는 순간 나는 방구석에 있던 다른 소총을 재빨리 거머쥐었다.
소련 소총에 익숙한 나는 나를 수색하려던 병사를 향해 한 발을 발사했다. 총탄은 그의 배를 뚫었으며 그는 즉시 그 자리에 쓰러졌다. 나는 다른 병사를 향해서도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알은 그의 몸을 스쳤고 그는 친구와 싸움을 계속했다.
나는 방아쇠를 다시 당겼는데 총탄이 격실에 끼여 나가지 않았다. 나는 익숙하게 격실에서 총탄을 빼낸 뒤 새 탄창을 끼워 제2탄을 발사했다. 총탄은 이번엔 그의 몸을 관통했다. 우리는 소총을 재빨리 분해해서 몸속에 넣은 후 현장에서 나와 남쪽으로 38선을 향해 걸음을 재촉, 마침내 남한 땅 의정부에 도착했다.
우리는 서울행 버스에 오르려다가 경찰 불심검문에 걸려 의정부경찰서에 연행됐다.
한민당 당원증과 고려혁명당 당원증을 제시했으나 통하지 않았다. 몸속에 숨겼던 소총이 발각됐고 소련병사를 살해한 사실도 드러났다.
'왜 이 소총들을 가졌는가?'라는 경찰관 질문에 나는 ‘공산주의자와의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서’라고 답변했다.
사건은 하지 주한 미군사령관에게 보고됐다.
버치 중위는 CIC의 책임자였다. 이화여대 정병준 교수는 그를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중위’라고 평가했다. 하버드대 출신의 변호사이면서 미 육군 중위의 계급장을 달았던 레너드 버치(Leonard Bertsch)는 이 사건에서도 미 군정의 막후 실력자의 모습을 보였다.
다음은 버치 중위가 손 글씨로 작성한 사건 비밀문건이다.
<7월 21일 한국인의 소련 병사 살해사건>
주한 미군사령부 CIC 본부 양평에 주재하는 소련인들은 하마스(Hamas: 주한 미군사령부 정보처의 러시아어 통역관) 중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복미(Bok-me) 계곡에서 경계임무 중이던 두 명의 소련 병사가 민가에서 남한사람 2명을 불심검문 하던 중 돌연 이들의 공격을 받았다. 한국인은 권총을 꺼내 소련 병사의 머리에 총격을 가했다. 다른 한국인은 소련 소총을 빼앗아 또 한 명의 소련병사를 총검으로 찔렀다. 소련군 2명은 모두 사망했다.
소련군들은 한국인들을 추적했으나 비가 내려서 놓쳤다.
II. 러시아 육군중위 그리고 독립군 간부
김경주는 CIC 조사에서 소련에 대한 강한 증오를 감추지 않았다.
그가 진술한 이력을 보면 그는 제정 러시아군 장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21세였던 1915년 러시아 육군에 입대해 중위계급을 받았다.
그러나 레닌이 이끄는 공산혁명의 와중에서 그는 혁명세력에 가담했고 세계 1차대전이 끝나는 1918년까지 군 선전부서에서 복무했다. 그는 차르(왕)의 군주정을 혐오했고 새 질서에 대한 기대도 컸기 때문에 혁명세력에 동조했다.
그러나 그는 공산주의 역시 참을 수 없었다. 그에 따르면 이들은 조국 해방을 위해 일본과 전투를 벌여 기필코 승리할 수 있는 군사조직으로 키우려 했고 이를 위해 러시아의 지원과 훈련을 기대했다. 그러나 혁명군은 분열 끝에 해체됐다.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에 따르면 고려군은 1921년 5월 3개 연대 규모로 결성되었지만 그 직후 발생한 자유시 사변을 겪으며 해체되었다.
김경주는 1925년 3월 북만주에서 새로 구성된 독립운동 단체 신민부新民府에 참가했다.
“대부분의 고려혁명군 대원들은 중국으로 이동했다가 그곳에서 흩어졌다. 그러나 나는 무장 단체들이 뭉쳐서 세운 신민부에 가담해 중위로 활동했다.”
신민부는 권총과 소총으로 무장한 500여 명의 별동대와 보안대를 편성하고 총사령관 김좌진 장군의 통솔 하에 활동했다. 신민부는 독립군 양성을 위해 성동 사관학교를 설립, 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또 각 지역에 둔전제를 실시해 모든 장정에게 군사훈련을 시키고 항일전을 준비했다. 상비군을 양성했으며 한인자녀의 의무교육을 목표로 소학교 50여 개를 설립했다.
그러나 신민부는 1927년 말 투쟁노선을 둘러싼 갈등이 이어지다 1928년 11월 빈주사건과 함께 해체됐다.
빈주사건은 무장투쟁을 우선한 김좌진 장군의 군정파가 군자금을 모금하는 과정에서 만주 동포들에게 강압적이었고 이에 항의하는 교포들을 무력으로 진압, 다수의 사상자를 발생시킨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교포의 민생과 교육을 중요시하는 신민부 민정파는 김 장군의 군정파와 결별했다. 김경주는 절망했다. 그는 그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신민부도 1930년경 해체됐다. 나는 그때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한국이나 만주는 일본인이 통치하는데 나는 그들을 증오했다. 그렇다 해서 중국으로 갈 수도 없었다. 나는 중국어를 모른다.”
김은 다시 러시아 국경을 넘었다. 그가 싫어하던 러시아군이었으나 자원 입대, 중위계급을 받았다. 그는 1933년까지 러시아 중부지방에 배치됐다.
김은 신민부에 소속했던 1925년 결혼, 이미 세 자녀를 가졌다. 그의 가족은 소속부대가 이주할 때마다 항상 함께 움직였다. 그는 다시 러시아·만주 국경을 지키는 특별경비대에 배치됐다.
그곳서 근무한지 1년이 지났을 때였다.
어느 날 소련정부는 그의 가족 모두를 기차에 태워 러시아 북부, 우랄산맥 북쪽에 있는 ‘아로보’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주 한국인은 8만 명이나 됐다.
스탈린 치하 소련에서 고려인 강제이주가 시작된 것은 1937년 8월이었다. 김은 혼자서 소련을 탈출하겠다고 작정했다.
“나는 러시아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 공산주의자들에게 맞서는 방법을 익혔다. 나는 어느 날 탈영해 중국으로 도피했다.”
중국에서 한국 여자를 만나 다시 결혼했다. 그 처녀 역시 러시아에서 태어났지만 중국으로 도피한 여성이었다.
그들은 가정을 이루어 네 아이를 가졌다.
김은 러시아에서 도주한 이후 그곳에 남겨둔 처와 세 자녀 소식은 전혀 모른다고 조사관에게 말했다.
김은 1936~1945년 중국 곳곳의 도시를 가족과 함께 전전하면서 시계와 기계를 수선하고 때로는 그가 그린 유화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김의 진술에서는 곳곳에서 역사적 사실과 시기에 착오가 있었다. 고려혁명군이나 신민군 가입과 해체시기가 실제와 다르고 특히 우랄지방 집단이주와 자신의 러시아 탈출 및 재혼시기가 어긋났다.
III. 테러리스트가 된 카레이스키
김은 1943년 한만국경의 작은 마을에서 6개월간 머물다가 1944년 봄 한국에 들어와 서울에서 시계점을 열었다.
이 가게는 <건국혈성대>라는 단체의 지하활동 거점이자 은신처였다. 이 단체는 항일투쟁을 이어가고 미군이 한국 서해안에 상륙할 때 지원하는 임무를 가졌다.
주요임무는 경부선, 경원선, 경의선의 철로 파괴였다. 항일 선전을 위해 한인들이 일본에 저항하도록 권장하고 일본군 징병거부와 함께 앞으로 닥쳐 올 해방의 시기를 위해 피와 에너지를 아끼도록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일본이 원자탄 2방에 손을 들자 이 계획들은 불필요, 미군의 남한 진주 후 조직은 해체되었다.
그러나 그가 참여했다는 <건국혈성대>의 실체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또 그가 미제 권총을 소지한 것으로 판단하면 그가 우익단체의 지원을 받았음도 추정된다.
그는 무장테러와 선전활동을 겸한 남한측의 대북 공작원이었다.
“나는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읽고 쓴다. 북한서 나는 때때로 소련어 통역관으로 행세하며 위험을 모면했다. 이번에는 7월10일부터 동료와 함께 38선을 30마일 정도 평행으로 다니며 반소반공 사상을 강연했다. 러시아인과 그들 제도의 사악함을 미국의 것과 비교했다. 그동안은 산속에서 먹고 잤다.”
이 CIC의 수사보고서는 매우 예외적으로 수사요원 의견을 자세하게 남겼다. 이 문서를 작성한 수사관은 ‘특수요원 4672’였다.
<수사요원 의견>
피의자 김은 러시아군 총격사건이 발생한 것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모든 일이 불과 5분 만에 순식간에 일어났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소련 병사들의 손에 자기 목숨을 잃을 수는 없으며 그가 원했던 것은 도망치는 것 뿐이었는데 사태가 다르게 나타났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들의 행위를 비난하는 것은 쉽겠지만 그날 그 좁은 공간에서는 우리가 죽느냐, 아니면 그들을 죽이냐의 문제 뿐이었다고 말했다. 중간의 타협점이나 다른 대안은 없었다.
수사를 맡은 특수요원 4672는 김씨는 진정한 애국자라고 강조했다. 특수요원은 그를 소련당국에 넘기지 말 것을 건의했다.
‘본관은 우리 측에서 수 주동안 김씨 등의 신병을 확보하고 있기를 건의합니다. 소련 측이 신병 인도 요구를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
이같은 보고서를 받은 하지사령관은 즉시 신병확보 결정을 내렸다.
*하지사령관의 G-2에 보내는 지시: 우리가 김씨를 소련 측에 넘겨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들의 유무죄를 따질 필요조차 없다. 어차피 소련 측은 재판도 없이 그들을 총살할 것이다."
당시는 미소공동위원회의 운영과 성패를 둘러싸고 미소 쌍방이 예민하게 반영하며 서로 눈치를 보던 때였다.
소련육군 중위였고 고려혁명군 소속 독립군 간부였으며 신민부 소속 독립군 중위, 다시 소련군 중위를 거치며 30년을 살아온 카레이스키 김경주는 그가 그리던 조국의 해방공간에서 반공 반소의 테러리스트가 되었다. 그는 러시아 우랄지방에 두고 온 첫 부인과 세 자녀를 모습을 그리며 눈물로 지샜을 것이다. 아쉽게도 그의 독립군으로서의 활동상황 기록이나 진술이 전혀 없다. 그리고 한국 현대사의 어느 구석에서도 그의 파란만장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혹시 장래에 나타날지는 모르지만.
◆김택곤 위원
<필자: 한국 방송통신심의위 상임위원. 저서: '미국 미밀문서로 읽는 한국현대사 1945~1950'- 우리가 몰랐던 해방/ 미군정/정부수립/한국전쟁의 기록(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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