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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트상품 아이디어<18> 명래제약소 - 이명래 고약
노랑종이에 침 묻혀 쓰던 종기치료약 무식과 가난의 징표
- 캐나다 한국일보 (editorial@koreatimes.net)
- Mar 30 2021 08:59 AM
이명래씨 1910년 전후 프랑스 신부에게서 비법 배워 제약 피부 불결한 때문? 전국의 종기환자들 고약 찾아 몰려와 방문 온 일본대령은 “너무 더러웠지만 효과 높았다”
까만 약을 따뜻한 아랫목에 놔두었다가 물렁물렁해지면 침을 묻혀가며 노란 기름종이에 펴 종기에 바르곤 했던 고약. 1960년대까지만해도 고약은 종기의 고름을 빼주고 상처를 아물게 해주던 가정상비약이었다.
이제 영양상태가 좋아지고 위생관념이 높아져 옛날만큼 종기환자가 많지는 않지만 「이명래(李明來) 고약」여전히 약국 진열대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종기치료에 특효... 1960년대 가정상비약
이명래 고약은 80년 전 이명래 선생이 프랑스 선교사의 도움에 힘입어 한방의서를 연구해 개발해낸 고약. 지금은 「明來(명래)제약소」와 「明來(명래)한의원」 두 곳으로 나뉘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약국에서 판매되는 이명래 고약은 서울 관철동 「이명래 고약 본포 명래제약소」에서 생산하는 것이다.
이 곳은 이명래 선생의 막내 딸—작고한 현민(玄民) 유진천(兪鎭千) 선생의 부인—인 이용재(李容載) 여사가 경영하는 제약회사로 지난 1956년 보사부로부터 고약 생산 • 판매허가를 받아냈다. 이명래 고약은 그로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팔리고 있으나 연간 매출실적은 1억원 정도에 불과하다.
“매약으로 제품화해서 일반 약국에서 판매하기 시작한 초창기에는 날개 돋친 듯이 나갔으나 1970년대 이후부터는 항생제 등 의약품의 대량보급에 따라 매출이 줄었습니다.”
이 제약소에서 19년째 근무하고 있다는 변호구(卞鎬久) 전무의 얘기이다. 변 전무는 “명래제약소가 현재 위치로 이사온 건 30여년 전으로 그 당시엔 종로 일대가 놋그릇을 파는 유기점이 즐비했었지요” 라고 희고했다.
명래제약소는 이명래 고약의 현대화된 모습인데 반해 이명래 선생이 생전에 고약집을 차렸던 애오개마루(지금의 충정로)에서는 「명래 한의원」이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명래 선생 생존 당시의 고약집은 현재 종근당 빌딩 자리에 위치했으나 지금은 부근 2층 벽돌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종근당 사옥 뒤켠 충정로 3가 명래한의원에서는 종기환자를 직접 치료하고 고약을 만들어 팔고 있다.
이명래 선생 곁에서 오랫동안 함께 생활하며 고약 만드는 비법을 전수받은 둘째 사위 이광진(李光眞) 씨가 이 한의원을 운영해 왔으나 최근 들어 이씨의 사위 임재형(林宰馨) 씨가 지키고 있다. 명래한의원측은 “전통 이명래 고약은 약국이나 다른 곳에는 팔지 않는다”며 이명래 고약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의원 입구에는 「元 이명래 고약집 명래한의원」이라는 간판을 걸어놓고 있다.
임씨는 “이명래 선생 생존 당시 전국 각지에서 종기환자들이 몰려들었던 것에는 못미치지만 아직도 서울 변두리 지역이나 지방에서 환자들이 찾아오고 있다”고 전한다.
거지 치료하며 비방 연구한 이명래
이명래 선생은 1890년 이병무(李秉武) 씨의 9남매 중 장남으로 서울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천주교 집안이었던 그의 가족은 한일합방을 전후해 천주교 백해에다 생활고가 겹치자 충남 아산군 인주면 공세리로 이주하게 된다.
이명래 일가족은 외국인 신부의 주선으로 공세리로 이주하기 위해 인천항에서 배를 탔다. 하지만 서울의 가산을 정리한 엽전 궤짝이 갑자기 몰아친 풍랑 때문에 바닷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이명래 가족은 겨우 목숨만을 건져 공세리 성당에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이명래 고약의 탄생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됐다.
당시 공세리 성당에는 드비즈(Devise • 성일륜) 신부가 사목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이 선교활동을 위해 의술을 배워 한방의서를 지니고 다녔다. 이명래는 성 신부 아래서 잔심부름을 하며 약 조제법과 치료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성당에 각종 부스럼 환자가 많이 찾아오자 성 신부로부터 배운 치료법을 토대로 종기를 치료하는 고약을 만들었다. 이명래는 종기가 잘 나는 거지들을 무상으로 치료하며 자신이 만든 고약의 효능을 실험하고 비방(秘方)을 연구했다.
당시 그가 만든 고약은 성 신부의 이름을 따 「成(성)고약」으로 불렀다. 성고약의 치료효과에 대한 소문은 사방으로 번져갔고, 곳곳에서 종기환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1920년 충청도에서 얻은 명성을 보다 넓은 곳에서 펼쳐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 남부 관문의 역촌(驛村)이었던 청파동에서 잠시 머무르다가 중림동 언덕빼기의 허름한 집으로 옮겨 더 좋은 고약의 효능실험에 주력했다. 중림동에서의 처음 생활은 넉넉하지 못해 아내가 하숙을 치며 생계를 도와야 할 형편이었다.
몇 년이 지나 그의 고약치료를 받은 종기환자들이 말끔하게 치료됐다는 소문이 서울 장안에 퍼지면서 그의 집에는 새벽부터 종기, 외상환자들이 줄을 잇게 되었다.
환자 하루 4백여 명씩 몰려 북새통
막내딸 이용재(李容載)씨는 당시를 “아버지께서는 몰려드는 환자들 때문에 새벽 미사를 마친 다음부터 오후까지 쉴 새 없이 진료를 해야했고 끼니를 거르기도 예사였다”라고 회고했다. 더욱이 환자들 대부분이 종기에서 고름이 났으므로 집안 전체가 불결하고 악취로 가득했다고 한다.
거의 매일 3백~4백 명씩 환자들이 몰려들자 순서대로 번호표를 나눠주고 기다리게 한 뒤 진찰을 하고 고약을 팔기도 했다. 성 신부로부터 임상지식과 경험만 물려받았을 뿐 체계적인 한의학을 공부하지 못해 면허증이 없었지만 이명래 선생은 일본인으로부터는 결코 면허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이 때문에 그는 일제시대에는 의생(한의사)면허증도 약종상면허증도 없이 환자를 치료하고 고약을 팔았다. 당시 위생감시 업무는 일본경찰이 담당했는데 경찰이 불결한 환경과 무면허를 문제삼을 때마다 벌금을 내거나 뒷돈을 주곤했다고 한다.
이명래 선생은 마침내 해방 뒤 미군정 시절 때 의생면허증을 취득하였다. 그는 새벽 5시 중림동 성당에서 미사를 본 뒤 집으로 돌아오면 곧장 기다리고 있던 환자들을 돌보다 9시쯤 밥 대신 정종 한 양재기와 달걀 두 개를 먹는 것으로 아침식사를 때우곤 했다.
그는 그 뒤 위궤양이 생기자 낮 12시까지만 환자를 치료했고 오후에는 친척들이 고약만을 팔았다. 당시 그의 명성은 일본인들에게도 알려져 한번은 사사키라는 일본 육좌(대령)가 목덜미에 난 커다란 발찌를 치료받기 위해 찾아왔다.
“이명래 고약집에서 세 번 놀랐다. 첫째는 너무 불결하고, 둘째는 치료비가 매우 쌌고, 셋째는 아주 잘 낫는다는 것이다.”
‘큰 발찌가 나면 관을 짜두라’고 할 만큼 일본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병으로 알려졌던 발찌가 완치되자 기쁨에 넘친 사사키가 총독부기관지 경성일보에 기고한 글 중 일부다.
6•25가 남긴 이명래 가족의 비극
이명래 선생은 1944년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일제의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중림동 시대를 마감하고 친척들이 살고 있는 경기도 평택군 서정리로 내려갔다가 해방이 되자 다시 서울로 올라와 애오개고개에 고약집을 차렸다.
그러나 6.25는 이명래 가족에게도 커다란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9.28 서울 수복 당시 이명래 선생의 사위 이광진(李光眞) 씨 집에 유엔군의 포탄이 명중, 마침 외출했던 이광진 씨만 살아남고 부인과 2남2녀를 모두 잃었다. 더욱이 인민군들이 후퇴하면서 20여 칸짜리 이명래 고약집에 불을 질러 이명래 부부는 잠옷 차림으로 피신해야 했고, 그와 관련된 자료도 모두 불타버렸다. 이명래 부부와 이광진씨는 이듬해 1.4후퇴 때 서정리로 피난했다.
만년을 시골 친구들과 어울려 술로 전시(전시)의 우울한 심사를 달래던 이명래 선생은 1952년 1월 6일 밤 술에 취해 잠이 든 뒤 뇌일혈로 다음 날 아침 숨을 거두었다. 이명래 선생은 사별한 첫 부인관의 사이에 딸 하나를 두었고 둘째 부인 사이에서도 딸만 둘을 두었다.
아들도 둘이 있었으나 모두 어려서 죽는 바람에 사위 이씨에게 가업을 물려주었다. 그는 보성전문 법과를 졸업한 사위 이씨에게 고약제조법을 전수했고, 서정리에 머물렀던 1951년 7월에는 사위 이씨를 서울로 올려보내 충청도에서 고약집을 운영하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명래한의원」은 장래가 불투명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이씨의 사위 임씨에 따르면 현재 이 곳의 한의원을 이을 사람을 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편 관철동 「명래제약소」에서는 재래식 고약 외에 1987년부터 밴드형 고약을 만들어 팔고는 있으나 역시 근근히 고약업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3층 회색 벽돌 건물 내에 간단한 기계설비를 갖춰놓고 있으나 직원 9명에 불과한 영세한 소기업으로 재투자는 업두도 못내고 있다는 게 변 전무의 설명이다.
양쪽으로 갈라져 법통(법통)싸움까지 벌이기도 했던 「이명래 고약」의 운명은 세태의 변화와 함께 앞날을 장담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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