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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본성을 응축한 하이드
140년간 변주해온 ‘최강 빌런’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Apr 27 2025 02:59 PM
뮤지컬·연극 동시 공연 ‘지킬앤하이드’
#. 미국 뉴욕 월가의 인수·합병 전문가 패트릭 베이트먼. 겉보기엔 평범하나 내적으론 차별과 혐오가 가득해 비밀스럽게 범죄를 일삼는 연쇄 살인마다.
#. 서점 직원 조 골드버그는 집착과 사랑의 경계에 있는 인물이다. 종종 여성들에게 책을 선물하는 지적인 모습과 달리 실상은 살인범이자 스토커다.
뮤지컬 '지킬앤하이드'에서 지킬(홍광호)이 술집 쇼걸 루시(윤공주)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오디컴퍼니 제공
크리스찬 베일의 연기력이 돋보였던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2000)와 '가십걸'의 댄 험프리로 이름을 알린 배우 펜 배질리가 주연한 넷플릭스 드라마 '너의 모든 것(You)'(2018~ ). 두 작품의 주인공은 겉모습과 내면이 극단적 대비를 이루는 공통점이 있다. 가까운 지인조차 두 인물의 진짜 모습을 알지 못한다.
이런 이중인격 캐릭터를 만나면 반사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이름이 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원제 'The 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 스코틀랜드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1850~1894)이 1886년 발표한 소설의 제목이다. 배경은 19세기 영국 런던. 의학 박사이자 법학 박사로 모범적 삶을 살아 온 헨리 지킬은 자신 안에 숨겨진 악의 본능을 끄집어내는 약을 만들어 에드워드 하이드로 변신한다. '인간의 이중성'은 스티븐슨이 세밀하게 들여다본 후 문학과 방송, 공연예술의 단골 소재가 됐다. '너의 모든 것' 시즌4에서는 조의 캐릭터를 설명하듯 책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가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최근 국내에서는 지킬의 내면에 잠재된 사악한 본성이 결집된 '최강 빌런' 하이드를 무대를 통해 만날 수 있다. 한국 초연 20주년을 기념하는 뮤지컬 '지킬앤하이드'와 1인극으로 풀어낸 동명 연극이 상연 중이다.
변호사 어터슨의 살인범 하이드 찾기
배우 최정원이 홀로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연극 '지킬앤하이드'의 한 장면. 글림컴퍼니 제공
'그자가 하이드(Hide·숨다)라면, 나는 시크(Seek·찾다)가 되겠다.'
소설의 중심 인물은 변호사인 가브리엘 존 어터슨이다. 오랜 친구인 지킬 박사의 유언장을 보관 중이다. '지킬이 사망하거나 3개월 이상 실종될 경우 전 재산을 친구인 하이드에게 넘긴다.' 하이드라는 사람을 전혀 모르는 어터슨에게 이 유언장은 오랫동안 눈엣가시였다. 소설은 어터슨이 수수께끼 같은 하이드라는 인물과 그의 주변에서 일어난 살인 범죄 사이의 연관성을 찾아가며 전개된다.
소설이 출간된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엄격한 도덕주의와 이면의 위선이 공존했다. 산업혁명이 절정에 달해 빈부 격차가 커지고 속물적 욕망이 분출하기 시작했다. 선과 악의 대립, 공적인 얼굴과 사적인 욕망은 자연스럽게 문학의 소재가 됐다.
그중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는 영화, 연극, 뮤지컬 등으로 반복적으로 만들어지면서 출간 후 약 14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꾸준히 회자된다. 소설을 읽지 않은 이도 지킬과 하이드가 각각 무엇을 상징하는지 잘 안다. 영국 문학 비평가인 클레어 하먼은 2005년 출간한 스티븐슨 전기에서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에 대해 "이 이야기는 이제 대중문화에 깊이 뿌리내려 문학 작품으로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평했다.
원작에 없는 뮤지컬의 엠마와 루시
홍광호가 연기하는 '지킬앤하이드'의 지킬(왼쪽)과 하이드. 오디컴퍼니 제공
스티븐슨은 지킬을 풍채가 좋은 50대 중년 남자로, 하이드는 키가 훨씬 작고 홀쭉한 젊은 남자로 그린다. 한 사람에게서 분리된 캐릭터지만 외모부터 다르다. 이에 대해서는 지킬의 입을 통해 '악한 본성을 자제해 왔기 때문에 선한 본성보다 발육이 뛰어나지 못한 것'으로 설명한다.
소설은 또 지킬이 애써 감추고 있는 악한 본능을 본문 곳곳에 표시해 놓았다. 어터슨은 "젊어서 거칠게 놀았던" 지킬이 과거에 저지른 추악한 행위 때문에 하이드와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아닌지 걱정한다. 지킬은 자신의 큰 결점으로 "향락에 쉽게 빠지는 기질"을 언급한다.
영상물이나 공연으로 옮겨진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 각색본은 대개 원작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는다. 미국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의 넘버 '지금 이 순간'(This is the Moment)으로 유명한 뮤지컬 '지킬앤하이드'가 대표적이다. 와일드혼이 작곡, 레슬리 브리커스(1931~2021)가 극본·작사를 맡아 1990년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 초연을 거쳐 1997년부터 4년간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됐다. 원작에 없는 여성 캐릭터 엠마와 루시가 등장하는 게 특징이다. 귀족이자 지킬의 약혼녀인 엠마는 지킬의 이성적 면모를, 술집 쇼걸인 루시는 하이드의 폭발적 본능을 표출하는 역할을 한다. 이와 관련해 와일드혼은 "스티븐슨의 원작은 여성 캐릭터가 거의 등장하지 않아 더 풍성한 이야기를 위해 필요했고 더 다양한 곡을 쓰는 데도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바로 이 작품이 2004년 한국으로 넘어오면서는 지킬이 확 젊어졌다. '지킬앤하이드' 국내 초연은 안무가 출신인 데이비드 스완이 연출을 맡아 대본과 음악만 가져오는 논레플리카(Non-Replica) 방식으로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공연됐다. 지킬과 하이드 역할에는 당시 20대였던 조승우와 30대 류정한이 함께 캐스팅됐다. 지킬은 중년 배우가 맡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 공연 관계자들도 놀랐을 정도로 파격적 선택이었다. 이미 뮤지컬 '지하철 1호선', '의형제' 등으로 탁월한 연기력을 보여줬던 조승우는 이 작품으로 단숨에 공연계 슈퍼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많은 남자 배우가 '꿈의 배역'으로 이 작품을 언급했고, 스타 산실이 됐다. 2008년 20대에 처음 캐스팅된 홍광호는 5월 18일까지 블루스퀘어에서 이어지는 이번 공연이 다섯 번째 출연이다.
5월 6일까지 서울 대학로 티오엠(TOM) 2관에서 공연되는 국내 초연 연극 '지킬앤하이드'는 각색본으로는 드물게 원작 소설의 서사를 충실히 따른다. 어터슨이 주요 화자가 되고, 뮤지컬의 루시나 엠마는 당연히 등장하지 않는다. 스코틀랜드의 극작가 겸 배우 게리 맥네어가 1인극으로 각색해 2022년 영국 버크셔주 레딩에서 처음 선보였다. 한국 공연은 지난해 1월 스티븐슨의 고향인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공연된 버전의 라이선스 작품이다. 연극은 어터슨을 비롯해 극 중 등장인물을 모두 소화하는 '퍼포머'가 혼자 이끌어 간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에서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라는 '퍼포머'의 고백으로 시작하는 연극은 악의 근원이 지킬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존재함을 보여주는 데 방점을 찍고 있다. 고훈정, 백석광, 강기둥과 뮤지컬 '지킬앤하이드' 2004년 초연에서 루시를 맡았던 최정원이 번갈아 무대에 오른다.
한국 관객에게 사랑받는 '지킬앤하이드'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의 챗gpt 생성 이미지.
지킬과 하이드의 이야기는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콘텐츠지만 유독 한국에서 인기가 많다. 뮤지컬 '지킬앤하이드'는 국내 초연 후 21년 된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다. 브로드웨이에서는 2013년 리바이벌 공연이 다시 무대에 올랐지만 흥행 실패로 조기에 폐막했다. 박병성 공연 칼럼니스트는 "한국 관객은 귀에 꽂히는 음악과 더불어 감정 진폭이 넓은 작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짚었다.
지킬이 약물로 분리해낸 하이드라는 공격성은 누구에게나 있는 인간의 본능 중 하나다. 손석한 정신의학과 전문의는 "지킬과 하이드는 해리성 정체성 장애의 예로 다루지만 우울증이나 불안장애처럼 흔하게 보는 질병은 아니다"라면서도 "이중성을 다루는 문화 콘텐츠가 많은 것은 우리 안에 내재된 공격욕을 자극함으로써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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