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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부론면 법천사지
- 미디어2 (web@koreatimes.net)
- Feb 22 2021 06:28 PM
110년 떠돈 국보 탑이 돌아온다... 기지개 켜는 천년 절터
▲ 1911년 일본인에 의해 이곳에서 반출된 국보 지광국사탑이 떠돌이 생활 110년 만에 돌아올 예정이어서 텅 빈 절터가 쓸쓸하지만은 않다.
이름 한번 거창하다. 원주 부론면(富論面)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부를 논하는 고을’이다. 남한강과 섬강이 합류하는 지점엔 이미 고려시대에 나라의 세곡을 소송하고 보관하는 조창인 흥원창이 설치돼 경제활동의 요지였다. 여러 지역의 물자가 모이고 사람이 왕래하니 새로운 소식을 주고받는 장이 펼쳐졌고, 정치와 경제에 풍부한 식견을 가진 이들이 많았으니 자연히 공론의 장이었다.
돈과 사람만 몰린 것이 아니라 당시 국가의 지도 이념이었던 불교 사원도 덩달아 번창했다. 나라의 스승이 될 만한 승려 즉, 국사(國師)를 배출한 두 개의 대형 사찰이 있었다. 흥원창이 이름만 남고 흔적 없이 사라진 것처럼 남한강 인근의 두 사찰, 법천사와 거돈사 역시 현재는 원주를 대표하는 절터로만 남아 있다.
떠돌이 생활 110년, 지광국사탑
기다리는 법천사지
전각이 사라진 절터는 쓸쓸하기 마련이다. 화려하고 웅장했을 목조 건물은 모두 불타 없어지고, 기둥을 떠받치던 석재가 아무렇게나 뒹굴어 시절의 덧없음을 반추하는 장소로 인식된다. 부론면 법천사지는 조금 다르다.
구석에 남겨진 석재 유물이 텅 빈 공간을 단단히 채우고 있다. 절터 자체가 사적으로 지정돼 있고, 문화재자료에 이름을 올린 당간지주 외에 국보가 2점이다. 그런데 2개의 국보 중 현장에는 지광국사의 공적을 기록한 지광국사탑비(국보 제59호)만 있고, 그의 혼을 담은 부도인 지광국사탑(국보 제101호)은 현재 대전의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보관 중이다.
▲ 대전에 있는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옮기기 전 2015년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촬영한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지광국사탑은 고려시대 국사 해린(984~1070)의 승탑이다. 독특한 구조와 화려한 조각, 뛰어난 장엄 장식으로 문화재청에서 역대 가장 개성적이고 화려한 승탑으로 꼽는 유물이다. 110년간 떠돌이 생활을 한 탑의 역사가 기구하다. 이 탑은 일제강점기인 1911년 골동품상이었던 일본인 모리가에 의해 반출돼 서울 명동의 무라카미 병원으로 옮겨진다.
이듬해에는 실업가인 와다 쓰네이치에게 매각돼 그의 저택 정원으로 이전했다가 후지타 헤이타로 남작에게 팔려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다. 같은 해 말에는 불법 매각과 반출을 확인한 조선총독부에 의해 다시 국내로 환수된다. 한국의 문화재를 아끼는 선의가 아니라 조선이 영원히 일본의 식민지로 남을 것이라는 확신에 따른 조치로 풀이된다.
▲ 지광국사탑비의 몸돌 상륜부 그림 탁본. 약 1,000년 전의 작품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각이 섬세하고 화려하다.
국내로 돌아온 후에도 승탑은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했다. 1915년 경복궁 조선물산공진회 미술관 앞 정원에 자리 잡았던 탑은 1923년 경회루 동편 근정문 부근으로 옮겨지고, 1932년엔 해체를 거쳐 경회루 동편 사정전과 아미산 사이에 다시 세워진다.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1만2,000조각으로 박살이 난 탑은 1957년 흩어진 조각을 모아 시멘트로 복원된다.
1990년에는 경복궁 복원사업을 하며 다시 국립고궁박물관(당시 국립중앙박물관) 뒤뜰로 이전된다. 모르타르를 덧붙여 조악하게 복원한 탑은 정밀 진단 결과 다수의 균열과 탈락이 확인돼 2016년 대전의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센터로 옮겨졌다. 특히 옥개석(머릿돌)은 절반 가까이 석재가 아니라 시멘트 덩어리였다.
제자리를 떠나 무려 아홉 번이나 이곳저곳을 떠돌던 고승의 혼은 5년여의 보존 처리 과정을 마무리하고 고향 원주로의 귀환을 앞둔 상태다. 원래 자리인 탑비 앞에 세울 것인지, 아니면 별도의 보호 시설을 지어 탑비와 함께 그 안에 보관할 것인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승탑을 기다리는 지광국사탑비 역시 당대 석공의 예술혼을 엿볼 수 있는 걸작으로 꼽힌다. 구름 위를 헤엄치는 듯한 받침돌의 거북은 턱밑에 기다란 수염을 달고 두 눈을 부릅뜨고 있어 생김새가 용에 가깝다. 몸돌 양 옆면에 새겨진 두 마리 용도 살아 움직이는 듯 생동감이 넘친다. 맨눈으로 확인하기 어렵지만 몸돌 상부의 세밀한 조각 역시 당시 석공의 기교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 도난 위험이 있는 일부 석재는 따로 모아 보관하고 있다. 정확한 용도를 알 수 없지만 단단한 화강암을 떡 주무르듯 조각한 솜씨에 혀를 내두를 정도다.
▲ 지광국사탑비 몸돌 옆면의 조각 역시 생동감이 넘친다.
법천사는 고려 초기 김제 금산사와 함께 개성 밖에 있는 지방의 선종 사찰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절이다. 무신정권 이전까지 법상종의 대표 사찰로 왕실과 문벌 귀족의 후원을 받아 번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609년 허균이 방문했을 때 이미 폐허였다는 기록이 있어 정확히 언제 어떻게 폐사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법천사지 전체 부지는 약 15만㎡로 웬만한 대학 캠퍼스와 맞먹는다. 절 어귀의 당간지주에서 지광국사탑비까지는 한참을 걸어야 한다. 약 15년에 걸쳐 경내에 있던 민가를 이전하고 기본적인 발굴 조사를 마무리하는 등 절터는 110년 만에 돌아오는 국보를 맞을 준비로 살짝 들떠 있는 듯 보인다.
남아 있는 초석을 중심으로 전각이 있었던 자리를 일부 정비했고, 땅속에 묻혔던 석재는 흙을 걷어 낸 상태로 관람객을 맞고 있다. 언뜻 폐허처럼 보이는 황량한 절터를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지키고 서 있다. 반대편이 훤히 보일 정도로 속이 비었지만, 무쇠다리처럼 든든히 버티고 선 모습이 고승의 자태다. 묵묵히 이 절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산 증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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