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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거사 맡으려 야단법석...“동지는 좀 쉬시게”
의열단 창단과 구국투쟁 <17>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Nov 27 2022 06:24 PM
상해 황포탄(黃浦灘) 사건 <1> "가증한 침략주의자 다나까... 살려보낼 수 없다"
1922년 3월 하순이다. 김익상 동지가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져 왜적의 간담을 서늘케 한 후로 이미 반년의 시일 이 지났다. 약산이 다시 새로운 활동을 위해서 계획을 구상하고 있을 때 마침 좋은 정보가 들어왔다. 일본의 육군 대장 다나까 (田中義一)가 머지않아 상해로 올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이 다나까라는 자는 일본 군부의 중견간부로 그 중에서도 군국주의의 급선봉이었다. 이번에도 저희 나라 정부의 비밀 사명을 띠고 필리핀 마닐라를 방문하였다 가 돌아가는 길에 싱가폴과 홍콩을 거쳐 상해를 지나간다는 것이다. 약산은 곧 상해에 머물러 있는 모든 동지를 한자리에 모이게 했다. 참으로 좋은 기회였다. 이 가증한 침략주의자를 도저히 그대로 살려서 귀국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를 살해한다 할 때 대체 어디에서 거사할 것인가? 그리고 누가 이 거사에 참여할 것인가? 의열단 원들은 다나까의 암살계획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신중히 연구를 거듭하고 또 진지하게 토론을 거듭했다.
1922년 3월 28일 일본군 육군대장 다나카(田中義一)가 필리핀 마닐라로부터 귀국하는 도중에 상해(上海)에 도착하였다. 이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항일운동단체인 의열단에서는 다나카를 사살할 것을 결정하고 치밀한 거사 계획을 세웠다. 사진은 의열단원들의 모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무엇보다도 무기가 제일 문제였다. 첫번째 총공격 때에는 비록 좌절되기는 했으나 중국인의 손을 빌려 외국제를 샀었기 때문에 왜적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정교하고 강력 한 것을 쓸 수 있었지만 우리들의 서투른 솜씨로 두들겨 만들어 가지고는 도저히 자신있는 활동을 할 수가 없었 다. 그렇다고 해서 매번 사서 쓴다는 것도 쉽지 않았다. 우선 어떻게 사느냐 하는 방법도 문제이려니와 자금도 충분치 않았다. 뭐니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기 확보와 자금의 조달이었다. 단원들을 총동원해서라도 우선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다행히 이번 일에 쓸 권총과 폭탄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그래서 누가 맡느냐 어디서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것이 논의의 촛점이 되었다. 서로들 자기가 해치우겠다고 야단이었다. 그 중에서도 김익상과 오성륜이 특히 적극적이었다. 이종암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럴 때 소위 단의 책임을 지고 있다는 사람이 선두에 나서지 않으면 다 른 동지들의 사기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김익상·오성 륜과 같은 열사가 기선을 다투는 판이니 문제는 없지만 그래도 그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서 종암은 김익상더러 "동지는 불과 몇 달 전에 총독부를 내리치지 않았는가. 이번에는 휴양겸 후퇴를 좀 하게" 하였지만 김익상은 지지 않는다. 본래 승벽이 강한 사람이었다.
“이동지야말로 밀양이다 부산이다 하며 수년간을 고생을 하며 돌아다니지 않았는가. 좀 쉬게.”
다른 동지들은 서로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하여간 세 사 람은 모두 제가 가겠다고 고집하고 아무도 양보하지 않았다. 약산 개인의 생각으로는 오성륜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이종암·김익상 두 동지가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
약산은 마침내 세 사람을 다 보내기로 하고 “김익상. 이종암 두 동지는 이미 국내에서 활동이 컸다. 그러니 이 번에는 오성륜 동지를 선두에 세우자”면서 "첫번째로 오성 동지는 상해에서, 두번째로 김익상 동자는 남경에서, 세번째로 이종암 동지는 천진에서 이렇 게 세 사람이 각각 대기하고 있다가, 첫번째 상해에서 안되면 그다음 남경에서 그리고 또 천진에서 이렇게 하면 틀림이 없겠지. 그놈이 무슨 재주로 세 번이나 모면할 수 있겠는가." 라고 김약산이 말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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