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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엘 콘도르( El Co'ndor)' - (26)
김외숙 소설가
- 캐나다 한국일보 (editorial@koreatimes.net)
- Sep 30 2021 10:48 AM
12. 프러포즈
그렇게 마이클을 만나면서 겨울을 보냈다. 캐나다의 겨울이 원래 그렇게 짧았던가? 늘 아쉽게 왔다가는 봄 같았다. 매일 마이클을 만나 봄날의 햇살처럼 화사하게 보내느라 어쩌면 계절의 경계도 의식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겨울이 유난히 짧았던 것이 아니라 내가 마음을 딴 데다 둔 탓이었을 게다. 그래서 잿빛 음산한 겨울은 잊은 탓이었을 게다.
그렇게 겨울을 봄처럼 보내고 자메이카에서 멕시코에서 돌아 온 인부들이 농장에서 일을 시작한 그 때, 앙증맞은 봄꽃들이 아직은 차갑기만 한 땅을 비집고 얼굴을 내밀던 그 즈음에 마이클이 프러포즈를 했다. 그는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레스토랑을 두고도 파크웨이의 그 곳, 자동차 안에서 내게 반지 함을 열었다.
“애나 힐스, 네가 처음 날 안아주고 우리가 첫 키스를 한 이곳에서 내 진심을 말하고 싶었어. 나, 너랑 오래 살고 싶어.”
그것은 분명 프러포즈였다. ‘너랑 오래 살고 싶어.’란 말이 결혼하자는 말 아니면 무엇일까?
처음 만나서 상대편을 탐색하고, 알고, 확신하기까지 겨우 계절 하나가 지나간 길이의 시간이었다. 타고난 나의 성정과 후천적인 영향의 긴 시간이 어우러져 나, 애나 힐스를 만들었는데 그 긴 시간 중의 지극히 짧은, 계절 하나 만큼 날 만난 마이클이 뭘 믿고 너랑 오래 살고 싶다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결코 돌아보고 싶지 않은 어렸을 적의 악몽 같은 기억을 품고 있던 나는 또 뭘 믿고 그의 제의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상대편에 대해 서로가 확신을 할 정도로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알고 있을까?
설령 다 안다할지라도 결혼은 둘 다의 인생을 건 도박일지도 모른다. 부정적인 측면만을 본다면 큰 리스크가 따를 수 있는 도박일 것이었다.
나는 내 인생을 건 이 도박을 진심으로 원할까?
화려하고 근사한 장소 다 두고 처음 안고 첫 키스를 한 자동차 안에서 마이클이 너랑 오래 살고 싶다고 했을 때, 수많은 질문이 내 속에서 일어나고 있었지만 나는 잠시 아무 말 없이 마이클을 바라보았다. 마이클의 푸른 눈동자가 영화 스크린인 듯 내 머릿속 필름의 기억이 마이클의 눈동자에 투시되며 빠르게 지나갔다.
동생을 낳다가 죽은 엄마가 제일 먼저 지나갔고 삼뽀냐를 불던 마리오 오빠와 티티카카호수에서 뚜르차를 잡아 석양을 등 뒤로 하고 집으로 오던 아버지가 지나갔다.
이어서 ‘마마니’였던 나를 ‘애나!’ 라며 말을 건 아이, 내 인생에 남자는 그 아이 뿐일 것이라 여겼던 그 브라이언이 잠시 마이클의 눈동자 스크린에 머물렀다.
첫 키스도 프러포즈도, 결혼도 그와 하고 싶다며 그것만 꿈꾸었던 내게 난데없는 한 남자가 반지 함을 내밀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낯설어서 울고 그리워서 울고 마음 붙일 데 없어 울어야했던 날 놀리고 또 놀리며 괴롭혔던 그 아이, 길 가다가 행여 우연으로라도 마주칠까 두려워한 아이,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내 마음이 우호적일 수 없도록 어렸던 내게 깊은 상처를 안긴 그 아이, 그리고 젊은 나이에 겪어야했던 고단했던 자신의 행적을 그대로 드러낸 청년, 브라이언의 말처럼 언제 다시 그 수렁에 빠질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마이클이 나와 함께 오래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 내 눈 앞에다 반지를 내밀며 거절하기 쉽지 않은 달콤한 말로 날 능멸하고 있는 것일까, 어렸던 때처럼? 도대체 이것이 말이 되는 소리일까? 도대체 그것이 가능키나 한 일인 것일까?
절대로 말 안 되는 그 이유대로라면, 끝까지 날 능멸하는 언행만으로 라면, 그 즈음에서 내가 그의 등짝을 한 대 후려치거나 뺨이라도 한 대 갈겨도 무방할 것 같았다. 나도 한 번쯤은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미안’ 그 한 마디에 ‘어렸었잖아.’ 라며 넘어간 그 일이 무게에 비해 너무 가볍게 넘긴 것은 분명했다. 그러니까 또 이런 헛소리를 하고 있을 테니까.
그런데 문제는, 분명 말은 안 되는데 ‘마이클, 너 왜 말도 안 되는 그 딴 소리를 하고 그러니?’ 란 말을 내가 못 했다. 말은커녕 눈물이 먼저 핑 돌았다. 눈물이라니, 내가 아무리 눈물이 많았던 아이였기로 이 시점에 이 무슨 눈치 없는 현상인지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왜 눈물이 먼저였을까? 왜 눈이 내 입술보다 먼저 대답을 했을까. 분명 서러움도 아니었고 슬픔일 수는 더욱 없었는데 눈에서는 한 번 핑 돌기 시작한 눈물이 걷잡을 수 없도록 흐르는데 나는 눈을 씀뻑이다가 고개를 치켜들어 진정했다가 그래도 감당할 수 없어 방치해 버렸다.
마이클이 이미 연 반지 함을 들고 ‘애나, 괜찮아?’ 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속에서 쿨렁쿨렁 뭔가가 마구 솟구치는 것 같아서 그러함에도 나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애나, 너 정말 왜 이러니?’
나도 날 다스릴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증상일까? 제동이 가능하지 않은 정체불명의 이 쿨렁거림을 감당하지 못해 급기야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울면서 말했다,
“그래, 살 거야 너랑. 마이클 너랑 오래 살고 싶다고!”
그러면서 손을 내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프러포즈엔 도박이라는 부정적인 의미의 계산보다는 내 마음의 향방이 답일 것 같았다.
내 눈물에 당황해하던 마이클이 그 때서야 함빡 웃음을 머금으며 반지를 내 손가락에 끼웠다. 마이클도 이미 눈물이 그렁한 채였다.
“울보네, 애나.”
마이클이 날 안고 젖은 내 뺨에다 키스를 하며 말했다. 내 손가락에는 내 눈물방울 같은 반지가 얹혀 있었다. 환희의 방울이었다.
“그 개구쟁이 마이클이 ... ”
마이클의 프러포즈를 식구들에게 말했을 때 어머니의 표정은 아주 복잡 미묘해 보였다. 왜 하필 마이클이니, 란 의미 같기도 하고, 우리 딸이 마이클에게 프러포즈를 받았구나, 하는 대견함 같기도 하고, 마이클에게 딸을 줘야 하는 어머니의 심정이 얽혀 있기도 했다. 브라이언은 입을 다문 채였다.
“내 딸을 어떻게 보내나!”
그리고 어머니는 눈물부터 앞세우셨다. 기쁨의 눈물, 섭섭함의 눈물, 많은 의미가 어우러진 눈물이었을 것이다.
“마이클이 좋은 청년으로 성장했다니 다행이구나. 집안끼리 서로 잘 아니 그것도 다행이야.”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긍정적인 생각만 하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았다.
“이럴게 될 줄 알았어요, 애나.”
수아는 활짝 웃었다. 수아가 나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첫 날부터 애나가 행복해 보였어요.”
수아가 오히려 사랑에 빠진 여자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부모님과 수아가 오히려 사뭇 들떠 웃음을 얼굴에 걸고 있어도 ‘축하해, 애나.’ 란 한 마디 뿐, 브라이언은 잠잠했다.
마이클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인 그 이튿날부터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 결혼날짜부터 잡은 우리 둘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커플이었다.
나는 점점 말이 많아졌다. 마이클을 만나고 온 날은 할 이야기가 더 많은 나는 더 이상 고요한 애나가 아니었다. 나의 변화에 어머니는 ‘사랑이 내 딸을 이렇게 바꿔놓는구나.’ 하며 신기하다는 듯 날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꼭 오래 전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구나.”
가족과 캐나다로 이민 오던 배에서 멀미로 고생하던 열다섯의 소녀에게 열여섯의 보이가 건넨 박하사탕이 인연이 되어 부부가 된 어머니와 아버지였다. 지금도 연애하듯 사시는 어머니가 그 때, 사탕 하나를 계기로 아버지로부터 프러포즈를 받았을 때를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애나야, 네가 내 딸이어서 엄마는 늘 행복하단다. 이제 마이클과 그 행복을 나눌 때가 왔구나. 그래도 잊지 않았으면 해, 네 뒤엔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페루의 엄마는 일찍 세상을 떠나셨고 오빠와 아버지와 산 어렸을 적의 기억은 낡은 사진 같았다. 부모님의 딸이 되고 브라이언의 누나가 되어 산 시간에 몸과 마음이 다 자랐으니 이제는 어머니의 딸임이 확실했다.
그러나 브라이언은 말수를 줄였다. 이미 확정된 일에 홀로 안 된다고 나설 수 없는 브라이언은 그래서 속의 불만을 홀로 삭이느라 말수를 줄이는 것이라 나는 이해했다. 브라이언을 가장 잘 아는 나였다. 마이클과 내가 행복하면 브라이언도 마음을 바꾸게 되리라. 모두 누나에 대한 동생의 관심으로 여기기로 했다. 그래야만 했다.
13. 그들의 사연
체리가 붉어갈 너무 덥지 않을 유월 초에 결혼식을 하자고 마이클과 나는 약속을 했다. ‘미안’을 말하려고 했었고 나는 ‘그 때는 우리가 어렸었잖아’ 라며 용서를 위해 시작한 만남이었다. 그 만남으로 주저하며 서로를 향해 다가갔고 만남이 다음 만남들을 만들어 마침내 결혼약속을 했다.
온타리오의 유월은 무르익은 봄이면서 설익은 여름이다. 살아 있는 것은 마음껏 비치는 햇빛을 누리고 바람과 신선한 공기를 누리고 신록과 꽃을 누리는 달이다. 체리는 붉어가고 유월 말 즈음이면 농장에서는 체리 피킹 간판을 내 놓을 것이다. 사람들은 사다리에 올라 따면서 먹으면서 체리의 계절을 즐긴다. 복숭아와 살구, 자두는 체리에 이어 나오고 포도와 사과는 천천히 익었다.
‘그렇지 않아도 농장 일로 바쁜데 아이들 결혼으로 우리가 더 분주하게 되었어요.’
어머니와 마이클의 어머니 에반스 부인은 서로 덕담을 주고받으며 행복한 고민을 했고 두 아버지들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결혼식은 우리 집 뜰에서 하죠. 브라이언이 못한 것까지 다 하고 싶어요.’
‘아이들 살 집은 준비되어 있어요, 조앤.’
두 어머니의 의견은 양 손바닥처럼 서로 잘 맞았다.
‘그렇군요. 그날 비는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혼인 날 비오면 부자 된대요.’
그러면서 두 부인은 호호호 웃었다. 좋은 생각만 하고 싶은 두 부인은 무엇에든 긍정적인 해석을 앞세웠고 이제 사돈이 될 사이라 그런지 관계가 더 돈독해진 것 같았다.
결혼식을 앞두고 나는 꼭 한가지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바로 브라이언을 만나는 일이었다. 매일 집에서 보긴 하지만 이번만큼은 둘이서 만나 지금까지 내 동생이어서, 날 지켜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걱정하지 말란 말을 하고 싶었다.
나는 브라이언이 일하는 와이너리에 갔다. 관광객들이 점점 찾기 시작하는 계절이어서 브라이언은 다른 어느 때보다 바빴다. 시중 주류 판매점에서 우리 와이너리에서 생산한 여러 종류의 와인을 팔고 있지만 외국에서 또는 다른 지역에서 찾는 관광객들은 역시 와이너리에 와 시음을 하고 기호에 맞는 와인을 사기 때문에 브라이언은 주인으로서 그 모든 일을 두루 살펴야 했다.
“브라이언, 나 왔어.”
“웬 일이야, 애나?”
종업원과 얘기를 나누고 있던 브라이언이 날 보고 반색을 했다.
브라이언은 점점 사업가로 틀을 잡아가는 것 같았다. 아버지도 브라이언이 코리아에서 온 후부터 경영수업을 시키셨고 성격적으로는 비즈니스보다 연구실에서 연구하고 실험하는 편이 어울릴 것 같은데 브라이언은 가업을 물러 받아야 한다는 현실을 이해했다.
“보고 싶어서 왔지.”
사람들 앞에서 보고 싶어서 왔다며 농을 할 정도로 마이클을 만난 후부터 나도 바뀌어가고 있었다.
“와, 가슴 두근거리네, 애나!”
브라이언도 나도 정말 가슴 떨리게 할 말도 이젠 농으로 주고받게 되었다. 피할 수 없는 변화였다.
브라이언이 커피를 만들 동안 나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아버지가 오래 일하신 공간이었고 이제는 브라이언이 주로 일을 하는 곳이었다.
브라이언의 책상엔 컴퓨터가 놓여있고 아기 이안의, 금방이라도 까르르 웃음소리가 터져 나올 듯 활짝 웃고 있는 사진과 브라이언과 수아가 이안을 사이에 두고 찍은 사진이 놓여 있었다. 이다음 내가 아기를 낳으면 마이클의 책상에도 사진이 놓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브라이언의 방에서 브라이언이 아닌 마이클을 생각하고 있는 내 심정의 변화를 나는 주시하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다른, 각자의 길을 갈 것을 왜 그토록 많은 시간을 그리워하고 애태우며 마음 아파한 것일까?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의 이유는 이제 브라이언에게서가 아닌 내 마음에서 나는 확인하고 있는 셈이었다.
“정말 무슨 일이야, 애나?”
양 손에 커피 컵을 든 브라이언이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할 말이 많잖아, 네게.”
할 말이란 내 말에 브라이언이 날 올려다보았다. 실은 브라이언도 마이클과의 관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 일에 대해 말을 아낄 뿐이었을 거다.
잠시 아무 말 없이 나도 브라이언도 커피 컵을 들고 있었다.
“결혼식 준비는 잘 진행되고 있어?”
브라이언이 먼저 결혼식을 말했다. 이것도 브라이언 방법이었다, 말하기 어려워하는 날 수월하게 해 주려는. 아련한 그리움이 일었다. 늘 나 먼저였고 나 때문에 마음 아파야 했고 나 때문에 코리아로 떠났고 나 때문에 부모님 앞에서 언쟁까지 마다하지 않은 브라이언이었다. 말하기 거북해 할 날 위해 먼저 말문을 튼 것이다.
“응.”
나는 짧게 대답했다. ‘응’ 그 한 마디로도 내 마음을 짐작할 브라이언이었다.
“그런데 왜? 순조로운데 왜?”
순조로운데 왜 저 때문에 마음을 쓰느냐는 말이었다.
“내 걱정하지 말란 말 하고 싶었어. 지금까지 나 때문에 넌 너무 많이..”
말을 하려는데 눈물이 가렸다.
지금까지의 내 입양의 삶을 브라이언에 대한 언급 없이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브라이언 때문에 시작되었고, 브라이언과 함께 성장했고, 브라이언을 좋아하고 사랑했고 브라이언과 함께하는 것이 내 꿈이었다.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 소중한 첫사랑으로 기억의 창고에 간직되어 여전히 사랑하는 동생으로 존재할 사람이었다.
“우리를 우리이도록 한 소중한 시간이었어. 그렇게 기억하며 사는 거야, 애나.”
그러면서 컵을 탁자 위에 놓고는 내 앞으로 와 이미 눈물이 구르고 있던 내 볼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어깨를 안았다, ‘잘 살아야 해.’ 하면서. 오빠 같았다.
“내가 집에서 결혼식 하게 돼서 미안해.”
자리에 가 앉은 브라이언에게 내가 진심으로 말했다. 외아들인 브라이언이 집에서 결혼식을 했다면 어머니와 아버지는 얼마나 더 흐뭇하고 행복하셨을까? 그 브라이언의 결혼식에 부모님은 참석조차도 하지 못했었다.
“부모님이 애나 결혼식이라도 마음껏 준비하실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나는 오히려 고맙다고 하고 싶은데?”
브라이언이 동생으로 돌아가 유쾌하게 말했다.
“다 지나간 일이지만 그 때, 많이 서운해 하셨어. 결혼식 참석 겸에 코리아 여행 한다고 기대가 크셨거든.”
브라이언이 수아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 후 한 번도 언급하지 않던 그 말을 내가 이제야 말하고 있었다, 부모님 심정에 대한 것이었다.
추리 하우스의 그 일로 어머니 앞에서 대들고는 코리아로 떠나 그곳에서 삼년 간 살면서 수아와 결혼반지만 서로 주고받는 것으로 결혼식을 대신한다면서 부모님은 오지 마시라고 했으니 이유를 알 수 없던 부모님은 서운하실 수밖에 없었다.
‘애나야, 내가 그렇게 잘못했니? 어떻게 어미를 결혼식에 못 오게 하니?’
그 때는 나도 브라이언의 방법이 옳지 않다는 생각을 했고 브라이언이 그럴수록 내가 부모님께 면목이 없었다. 브라이언의 코리아 행이, 그리고 그곳에서의 결혼이 모두 나로 인해 생긴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브라이언은 너무나 매몰차서 부모님의 서운한 감정을 쓰다듬는 시늉조차도 하지 않았고 그것은 내가 아는 브라이언의 방법이 결코 아니어서 나 또한 이해하지 못했었다.
‘어렸을 때 잃은 브라이언을 다시 잃은 것 같구나.’
어머니는 오랫동안 자리에서 나오지 않으셨고 어머니 때문에 아버지는 자식에 대한 실망감조차도 드러내지 못하셨다.
“사정이 있었어, 애나.”
부모님께 변명으로라도 한 적 없던 그것을 브라이언이 사정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물을 수 없었다. 분명 있었을 사정, 그 사정을 말할 수 없을 때는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다 지나간 일이었고 부모님은 그 때의 일은 묻어두고 아기 이안과 브라이언 내외와 웃음소리 속에서 사시기 때문이었다.
“내가 영어를 가르치던 학원건물에 카페가 있는데 그곳에 가면 늘 같은 테이블에 긴 머리의 한 여자가 앉아 있었어.”
브라이언이 그 사정을 말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브라이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여자는 내 클래스의 학생이었는데 수업이 끝난 후에도 그곳에 앉아 있어서 좀 궁금했어, 왜 돌아가지 않을까 하고. 하루는 내가 다가가 커피 함께 할까요, 하고 얘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가까이서 보고는 깜짝 놀랐어, 그 눈, 눈이 애나의 눈이었어.”
수업시간에는 그리 눈길을 끈 학생이 아니었다고 했다.
“내가 처음 애나를 봤을 때의 그 눈이었어, 까만 포도 같은. 그래서 하루는 물었어, 수업이 끝났는데 왜 돌아가지 않느냐고. 그랬더니 ‘가면 다시는 나오지 않게 될까봐서요.’ 라는 거야.”
브라이언이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말했다.
‘애나 눈이 포도 같아.’
오래 전 내가 마마니였던 그 때, 페루를 찾은 브라이언 가족을 처음 만난 마마니였던 나를 일러 브라이언이 ‘애나’라면서 ‘애나 눈, 포도 같아.’라고 했다며, 포도농원에 둘러싸여 사는 아이 아니랄까봐 네 눈을 보고 그렇게 표현 하더라며 어머니가 웃으신 적이 있다. 마마니였던 나를 브라이언이 왜 애나라고 불렀는지는 어머니도 알 수 없다며 아마도 부르기 쉬워서였을 거야, 라며 그 때부터 내 이름 마마니는 애나가 되어 불렸다. 그런데 수아의 눈이 바로 검은 포도 같았다고 브라이언이 말했다.
나도 커피 한 모금을 마셔야했다.
“무슨 사연이 있구나, 짐작을 했었어. 집에 돌아가면 다시는 나오고 싶지 않을 사연을 품은 여자, 그 때 내 속에서는 장난기가 좀 발동했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집에만 있지 않고 매일 나오도록 해야겠다는. 그래서 내가 가장 잘 아는 얘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내 나라 캐나다, 온타리오 호수, 우리 동네, 낚시, 과수원, 와이너리...”
하나씩 이야기를 하고는 ‘다음 얘기는 내일’ 하며 다음 날을 기다리게 했다고 언젠가 수아가 한 말을 브라이언이 했다. 그렇게 매일 한 가지씩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하루는 수아가, 애나란 누나는 이야기 속에 꼭 등장하네요. 하고 말했단다.
“수아에게 들킨 거지, 내 마음을. 그래도 상관없었어, 수아는 다만 내 클래스의 약간 사연을 가진 학생이었으니까. 그렇게 매일 나는 이야기 하고 수아는 내 영어 수업보다 더 귀 기울여 듣더니, 또 그러는 거야, 당신, 세헤라자데 같아요, 하고. 처음엔 무슨 소린가 했는데 애나랑 추리 하우스에서 번갈아 읽은 바로 아라비안나이트, 그 이야기들로 목숨을 부지하고 왕비가 된 여인이 떠오르는 거야.”
그 때 아마도 브라이언은 내 무릎을 베고 누워 책을 읽고 있었을 테고 나는 뜨개질을 했거나 삼뽀냐를 불고 있었을 게다. 그리고 브라이언이 읽다가 잠이라도 들면 손에서 살며시 책을 뽑아들고 내가 읽었다.
‘그렇게 사랑을 키웠구나, 수아와.’
들으면서 생각하니 그것은 바로 브라이언의 연애 담이었다.
“그런데 코리아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오려는데 수아가 마음에 걸리는 거야. 이야기로 수아의 마음을 좀 밝게 해 주었다고 여겼는데 내가 떠나면 아무도 수아가 바깥으로 나오고 싶도록 해 줄 사람이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내가 말했어, 나 이제 더 이상 세헤라자데는 안 하겠다고, 목숨을 걸고 하는 그 방식은 더 이상 못하겠다고, 내 방식으로 하겠다고. 그래서 캐나다에 함께 가서 말로 한 그것을 다 보여주고 싶다고 했지.”
“프러포즈였네?”
내가 말했다.
연인에게 프러포즈는 가슴 설레게 하는, 멋진 일이었다. 마이클이 내게 한 프러포즈도 그러했었다.
나는 브라이언 앞에서도 이제 거리낌 없이 마이클을 생각했다.
“분명 프러포즈였는데 수아가 그러는 거야, 나에 대해 얼마나 아느냐고? 그러고 보니 나만 늘 말하느라 수아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어. 그래서 아는 것이 없다, 라고 했더니 ‘알지도 못하면서 인생을 걸려고 하다니 경솔한 사람이군요.’ 그러는 거야. 단호하게 거절하는 수아의 냉정에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던 마음이 싹둑 잘려나가는 것 같았어.”
그렇지 않아도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아픔을 안고 코리아로 간 브라이언이었다. 그리고 수아에게 그런 단호함이 있다니 내게도 의외였다.
“그래서 내가 말했어, 만일 수아 당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려줬어도 당신을 다 안다고 말할 수 없을 거다, 내게 중요한 것은 당신의 개인적인 배경이 아니라 지금까지 내 말을 듣고 이야기를 주고받던 수아, 그 모습이다, 라고. 당신은 그 동안 내가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을 스스로 다 보여주었다고. 내가 물어본 적 없는, 내가 꼭 알아야 할 이유가 없는 과거의 그 무엇보다 이것이 더 작고 하찮은 건가, 하고. 서로 모르는 어떤 부분은 앞으로 알게 될 거라고. 내 관심은 수아가 내 프러포즈를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거라고.”
그래, 브라이언은 이런 사람이지,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따뜻하고 이해하고 품어주는 사람. 멋진 남자였다.
“그런데 수아가 그러는 거야, 나, 결혼에 실패한 적 있어요, 하고.”
“수아가?”
무심코 있는데 누가 얼음물이라도 휙 끼얹기라도 한 듯 내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그래서 수아의 눈이 그토록 고요히 깊었던가?
“내가 말했어, ‘많이 아팠겠네요, 수아. 나도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했어요. 많이 아팠죠. 코리아에 온 이유도 그 때문이고요. 그런데 그 일로 다시는 사랑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수아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다만 끝까지 이루지 못할 아픈 경험을 했을 뿐이죠.’ 라고.”
그리고 부모님을 모시고 결혼식을 한 후 돌아오려고 했는데 수아가 자신의 결혼식과정을 말했다고 했다.
“결혼식 날, 신랑과 신부가 주례 앞에 서 있는데 갑자기 출입문이 열리면서 유모차를 앞세운 여자가 식장에 들어서며 ‘그러지 마세요. 저 사람, 내 아기 아빠예요!’ 라며 울부짖는 일이 있었대. ‘그 여자의 손가락이 분명히 내 옆의 남자를 가리키고 있었어요.’ 라고 수아가 말했어.”
“...!”
나는 숫제 외마디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멍하니 브라이언을 바라보고 있었다.
“ ‘그 여자의 손가락은 남자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내 아기 아빠예요, 란 말은 분명히 나한테 한 말이었어요.’라고 수아가 말하더라.”
분명 브라이언을 보고 있는데 내 눈 앞으로 수아,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우물처럼 깊은 눈으로 넋이 나간 듯 서 있었을 그 수아가 스쳐지나갔다.
말할 수 없는 슬픔과 분노가 내 속에서 일었다. 많은 사람이 바라보던 인생의 최고 정점에 올라 선 한 여자의 삶이 한 순간에 무자비하게 난도질당하고 마구 짓이겨진 일이었다.
‘그래서 눈이 그렇게 깊었구나. 어떻게 다 감당했을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괴었다. 그 가혹하도록 무거운 사연을 묻어두고 있었으니 그렇게 깊고 고요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았다.
그것도 모르고 눈앞의 브라이언과 수아로 힘들어 한 일들이 미안했다. 눈치가 없지 않았을 수아로 하여금 더 침묵하게 했을, 나와 수아 사이의 브라이언으로 하여금 더 힘들도록 했을 ‘미안’이었다.
“그래서 말 못했어. 나, 수아를 편하게 해 주고 싶어, 애나. 애나도 마이클과 행복해야 해.”
‘아, 브라이언, 좋은 내 동생.’
내가 브라이언을 깊이 바라보았다. 이제야 이해할 것 같았다, 결혼식으로 부모님을 그토록 서운하게 해 드리고서도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던 그 사정과 심정을.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브라이언을 다 안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견고하던 남매란 경계선 앞에서 애가 타던 그 더운 감정을 다 걸러내고 나니 다른 어느 때보다 다정한 동생과 누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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