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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달에
소설가 김외숙
-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editorial@koreatimes.net)
- Dec 30 2022 11:31 AM
소설가 김외숙
“나, 찢어졌어.”
마치 남의 일이듯이 여상한 목소리로 친구가 말했을 때 나는
‘얘가, 결국 일 저질렀네.’라고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렇기로 찢어질 관계 봉합해도 모자랄
성탄 이브에 이별이라니 더구나 이 나이에...그래서 ‘저질렀다’란, 다소 격한 표현이 내 입에서 비어져 나왔을 것이다.
“나, 괜찮아. 그동안 행복하게 해 줘 고마웠다 란 말만 하고 잘 보내줬어.”
“아이구, 천사 나셨다.”
끝까지 쿨한 척하는 친구를 타박하면서도 속으로는 근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친구가 남자친구와 헤어졌듯 나 개인적으로도 12월은 이별의 달이다. 10월 초에 서울에 가 두 달간 연세 아흔이신 노모와 지내다 12월 초에 돌아와야 했으니 이별이었고, 와서 한 주 뒤에 한 해 동안 육아 휴가를 얻어 나와 함께 지낸 아들 네 식구를 다시 서울로 보내야 했으니 그 또한 이별이었다.
잡은 손 놓으면 그대로 폭 쓰러지실 것만 같던, 금방 굴러떨어질 눈물 그렁하던 노모의 모습이 비행시간 내내 날 따라와서 나는 울며 왔고, 한 주 후 이른 아침에 토론토 공항으로 아들 네 식구를 떠나보낸 후 나는... 드러누워 버렸다.
어디 그뿐인가?
올 12월은 내가 내 인생의 육십 대와 이별하는 달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12월에 나는 만날 확률이 있는 이별과 다시는 만나지 못한 이별, 그러니까 사람과 시간과 이별을 하는 것이다.
살면서 누가 이별을 경험하고 싶겠는가?
그러나, 만남으로 시작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만남은 이별을 동반하니 그 누구도 어떤 이유로든 피할 수 없다. 다만 그 이별을 받아들이는 심정을, 방법을 달리할 뿐이다.
늦게 만나 평생 갈 줄 알았던 인연을 떠나보내는 순간에 고마웠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이별의 방법이 있는가 하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처럼 드러누워 버리는 이별도 있다.
세상에 사람이 그 인간뿐이야, 하며 오기로 털고 일어나는 이별이 있는가 하면, 머리 검은 짐승, 다시 믿나 봐라, 라며 이를 가는 이별도 있다.
어떤 방식이든 마음에다 깊은 상처를 남기고 얻는 것이 이별이어서 그래서 사람들은 이별을 피하고 싶은 것이다,
그 피하고 싶은 이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시는 만날 일없을 2022년과의 이별을 또 해야 한다.
그런데, 어차피 해야 할 이별, 나는 친구처럼 정말 좀 근사하게 하려고 한다. 행복했던 기억만 하며 고맙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한 해 동안 내 인생이 누린 고마움의 순간은 손가락으로는 다 꼽을 수 없지만 그 중에서 특히 서울 방문 동안 연세 아흔의 어머니를 뵙게 해 주어서 고맙고, 아들 내외와 두 손자녀와 한 해나 살아보는 복을 누리게 해 줘서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내 인생의 새로운 장이 펼쳐질 새해를 만날 징검다리 역할을 해 주어 고맙다는 말도 하고 싶다. 이 해 없이 어찌 새해를 보겠으며, 예순 없이 어찌 일흔을 보겠는가?
그렇게 고마운 일만 돌이켜보며 새해 맞을 준비를 하는데 친구가 전화를 했다,
‘외숙아,’ 하면서.
“나 죽겠다, 어떡해?”
이별을 남의 일처럼 말하던 그 친구의, 며칠 곡기 끊은 목소리였다.
친구는,
넌더리 날 이별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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