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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손기정 아해
김태형(미국 조지아주 거주 의학박사)
- 캐나다 한국일보 (editorial@koreatimes.net)
- Apr 18 2023 06:50 AM
”당신은 감동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가.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지도를 펴기 바란다. 아마 당신이 알고 있을 중국과 일본 사이에 한반도가 있고 그곳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보일 것이다. 이야기는 이 조그만 나라의 어느 마라토너가 중심에 있다. 이 나라는 지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중국과 일본이라는 두 무력에 의존하는 나라 사이에서 놀랍게도 2000년간 한번도 자주성을 잃어본 적이 없는 기적에 가까운 나라다. 그리고 이럴 경우 이 한국인들은 나라 대신에 민족이라는 표현을 쓰기를 좋아한다. 어느 여름날 우연히 본 한 장의 사진 때문에 나는 이 나라, 아니 이 민족의 굉장한 이야기에 빠져들고 말았다. 1936년 히틀러 통치 시절, 베를린에서 올림픽이 열렸고 그때 두 일본인이 마라톤 경기에서 1위와 3위를 차지하였다. 2위는 독일인이었다. 한데, 시상대에 올라간 이 두 일본인 승리자들의 표정, 이것은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슬픈 모습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이 불가사의한 사진…. 무엇이 이 두 승리자를 이런 슬픈 모습으로 시상대에 서게 했는가…. 과거도, 그리고 현재도 가장 인간적인 유교라는 종교가 지배하는 이 나라 아니, 이 민족은 이웃한 일본인(죽음을 찬미하고 성에 탐닉하는)에 대해 '영리한 원숭이'에 불과하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며, 불행히도 이 인간적인 품위를 중시하는 자부심 강한 민족이 이 원숭이들에게 '강간'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침략, 즉 식민지로 떨어지고 말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당시 대부분의 불행한 식민지의 청년들은 깊은 고뇌와 번민에 개인의 이상을 희생하고 말았고, '손' 과 '남'이라고 하는 두 청년 역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이 두 청년은 달림으로써 아마도 자신들의 울분을 표출해야만 했는지도 모른다. 이 두 청년은 많은 일본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마침내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달렸을 것이다. 달리는 내내 이 두 청년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들은 승리했고 시상대에 오를 수 있었지만 그들의 가슴에는 조국 한국의 태극기(이 국기는 대부분 나라의 그것이 혁명이라든가 투쟁이라든가 승리 또는 위대한 황제의 문양인 데 비해 우주와 인간과 세상 모든 것의 질서와 조화를 의미한다) 대신에 핏빛 동그라미의 일장기가 있었고, 관중석에 역시 이 핏빛 일장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이때 이 두 청년의 표정이란… 그들은 깊게 고개를 숙인 채 한없이 부끄럽고 슬픈 얼굴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뉴스를 전한 일본 검열 하의 한국 신문 Eastasia(동아일보)는 이 사진 속의 일장기를 지워버리고 만다. 이 유니크한 저항의 방법, 과연 높은 정신적인 종교 유교의 민족답지 않은가. 그런데 일본 정부는 이 신문사를 폐간시키고 만다. 이 우습고도 단순하면서 무지하기까지 한 탄압의 방법으로….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마침내 이 민족은 해방되고 강요당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무서운 또 한 번의 전쟁을 치른 후, 한강의 기적! (한국인들은 지구상에서 일본인들을 게을러 보이게 하는 유일한 민족이다)을 통해 스페인보다도, 포르투갈보다도 더 강력한 경제적 부를 이루고 만다. 그리고는 1988년 수도 서울에서 올림픽을 개최하는데 이른다. 불과 50년! 태극기조차 가슴에 달 수 없었던 이 나라, 아니 이 민족이 올림픽을 개최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개막식, 성화를 들고 경기장에 들어선 작고 여린 소녀 마라토너로부터 성화를 이어받은 사람은 그날 너무나도 슬프고 부끄러워했던 승리자, '손(손기정)'이었다. 노인이 되어버린 이 슬픈 마라토너는 성화를 손에 든 채 마치 세 살 먹은 어린애와 같이 훨훨 나는 것처럼 즐거워하지 않는가! 어느 연출가가 지시하지도 않았지만, 역사란 이처럼 멋지고도 통쾌한 장면을 보여줄 수 있나 보다. 이때 한국인 모두가 이 노인에게, 아니 어쩌면 한국인 개개인이 서로에게 얘기할 수 없었던 빚을 갚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극적이게도 서울올림픽 도중에 일본 선수단은 슬픈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쓰러져 죽음을 기다리는 히로히토 일왕의 소식…. 한국인들의 종교 유교는 인간, 심지어는 죽은 조상에게까지 예를 나타내는 종교다. 이 종교의 보이지 않는 신이 인류 역사상 (예수나 석가도 해내지 못한)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기를 바랐다. 이처럼 굉장한 이야기가 이대로 보존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집념과 끈기, 그리고 폭력과 같은 단순함이 아닌) 놀라운 정신력으로 그들이 50년 전 잃어버렸던 금메달을 되찾고 만 것이다.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4년 후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에서 '황'이라고 하는 '손' 노인과 너무나 흡사한 외모의 젊은 마라토너가 몬주익 언덕에서 일본과 독일 선수들을 따돌리고, 마침내 더 슬프지 않은, 축제의 월계관을 따내고 만 것이다. 경기장에 태극기가 올라가자 이 '황' 은 기쁨의 눈물과 함께 왼쪽 가슴에 달린 태극기에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는 관중석으로 달려가 비극의 마라토너 '손'에게 자신의 금메달을 선사하곤 깊은 예의로서 존경을 표한다…. '황'을 가슴에 품은 '손' 은 말이 없다.
나는 이 이야기를 접하고는 인간에 대한 신뢰에 한없이 자랑스러움을 숨길 수 없었다. 인간이란, 이 한국인 아니 이 한국 민족처럼 폭력과 거짓과 다툼이 아니라 천천히 그러나 불굴의 의지로서 자신들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그것이 비극적인 눈물로 시작된 역사일지라도 환희와 고귀한 기쁨의 눈물로 마감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상 어느 민족도 보여주지 못했던 인간과 국가와 민족의 존엄을 이 한국인 아니 한국 민족이 보여주지 않는가!! 도서관에 달려가라! 그리고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시상대에 두 한국인의 사진을 찾아라…. 당신은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인간이 될 것이다.“
위의 인용된 글의 원문은 독일 언론인 Stefan Muller씨가 썼고 한국 유학생이 번역해서 올렸다. 이 글의 전문(全文)이 2001년부터 인터넷에 오르내린다. 이 글을 읽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한국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까? 만일 Muller씨를 찾을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얼싸안아 주고 싶다. 그와 만나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손기정 선수의 각고의 훈련, 일본 코치의 차별대우, 굶주림, 나라 잃은 슬픔, 태극기 아닌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달린 뼈아픔, 우승 시상대에선 월계수로 일장기를 가렸지만, 본부석에서 들려오는 건 애국가 아닌 기미가요…우승 당시의 감회를 손기정 선수로부터 직접 들어보기로 하자. “마침내 올라선 마라톤 세계 정상에서 맛본 것은 끝없는 좌절감뿐이었다. 마라톤의 우승은 나의 슬픔, 우리 민족의 슬픔을 뼈저리도록 되새겨 주었을 뿐이었다. 나라가 없는 놈에게는 우승의 영광도 가당치 않은 허사일 뿐이었다”(1). 마라톤에서 우승한 바로 그 날, 선수촌에서 큰 소동이 일어났다. 그 사건의 경위는 이렇다. 선수촌 안에서 일본 선수단은 축하연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정작 마라톤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딴 손기정과 남승룡 두 선수가 보이지 않았다. 이들이 감쪽같이 선수촌을 빠져나갔던 것이다. 당시 응원차 개인 자격으로 베를린에 와있던 권태하 선배(LA올림픽 마라톤 9위)는 두 선수를 대동하고 베를린에 살고 있던 안중근 의사의 4촌 안봉근(安鳳根)씨의 집으로 달려가 한인만의 축하연을 따로 연 것이다. 그때 안씨 집 벽에 걸린 태극기 한 장이 손기정을 감격의 전율로 빠지게 했다고 한다. 손기정의 선수촌 무단이탈로 인해 일본 선수단 측은 발칵 뒤집혔고 한국인 선수들은 귀국 길 내내 멸시와 감시를 받았어야 했다.
나는 지금까지 누구의 글에서도 Stefan Muller를 능가하는 감동적인 글은 찾지 못했다. 아마 영영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마라톤에 관한 한 초년생인 내가 여기에 또 무엇을 부연할 수 있겠는가?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살사건의 여파로 1936년 10월8일 손기정, 남승룡 두 선수가 귀국하던 여의도공항은 살벌했다. 경찰과 형사만 보일 뿐 환영 인파가 없었고, 육상관계자의 공항 환영행사도 모두 취소된 상태였다. 바로 4개월 전 6월, 올림픽선수단이 시베리아 대륙횡단 철도에 오를 때의 분위기와는 딴판이었다. 그때는 경성역 그릴에서 축하 일색의 환송연을 가졌고 그때는 조선 체육회 회장 윤치호와 많은 체육계 인사가 나와 조선 청년의 기상을 펼쳐 승리하고 돌아올 것을 열렬히 당부했다. 그런데 이제 금메달, 동메달을 들고 온 선수단을 환영조차 못하게 하다니! 윤치호는 환영회의 취소를 그냥 넘겨 보내지 않았다.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세계 제패를 기념해서, 즉시 체육관 설립을 추진했고 모금활동을 진행했다. 하지만 어쩌랴. 이것도 총독부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으니. 당시 체육관 건립을 무산시킨 장본인인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는 뻔뻔하게도 다음과 같은 담화문을 남겼다. “손기정, 남승룡 두 선수는 우리 반도의 자랑이다. 조선반도에는 이같이 우수한 청년이 많이 있다”라고.
그날 승리의 감격을 전해주는 기록물을 찾아보니, 상록수의 저자 심훈의 화려한 송축시가 제일 먼저 눈에 띈다. “그대들의 첩보를 전하는 호외 뒷장에 붓을 달리는 이 손은 형용 못할 감격에 떨린다. 이역의 하늘 아래서 그대들의 심장 속에 용솟음쳤던 피가 2,300만의 한 사람인 내 혈관 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은 깊은 밤 전승의 방울 소리에 터질 듯 찢어질 듯 침울한 어둠 속에 짓눌렸던 고토(故土)의 하늘로 올림픽 거화(炬火)를 치켜든 것처럼 화닥닥 밝으려 하는구나. 오늘 밤 그대들은 꿈속에서 조국의 전승을 전하고자 마라톤 험한 길을 달리다가 절명한 아테네의 병사를 만나보리라. 그보다도 더욱 용감하였던 선조들의 정령이 가호하였음에 두 용사 서로 껴안고 느껴 울었으리라.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어 잡고 전 세계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 부를 터이냐?” 또 하나 당시 중경에 있던 중국 국민정부 수반 장개석의 의미심장한 말도 전해진다. “수억 인구의 중국이 2천만 인구를 가진 조선만도 못하다. 손기정의 우승은 3.1 운동, 광주학생운동에 이어 조선 민족이 보여 준 제3의 쾌거다“라고.
나는 안익태 작곡의 현행 애국가(Auld Lang syne tune이 아닌)가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 전후에 처음으로 불렸다는 사실에 흥분을 금할 수 없다. 안익태는 1936년 올림픽 두 달 전인 6월 어느 날 갑자기 악상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리고 8월1일, 베를린 올림픽 개막식 직후 스타디움 서북쪽 코너에 와서 손기정, 남승룡 등 조선인 올림픽 출전 선수 7명(마라톤의 손기정, 남승룡, 축구의 김용식, 농구의 이성구, 장이진, 염은형, 복싱의 이규환 )에게 자기가 작곡한 응원가를 부르자 했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애국가였다. 며칠 뒤 8월9일 손기정 선수가 세계신기록으로 스타디움으로 힘차게 들어올 때 손기정의 눈에 제일 먼저 띈 광경이 안익태와 두세 명의 조선 청년들이 미친 듯이 큰 소리로 애국가를 부르는 광경이었다. 이날 손기정에게는 독일군악대가 연주하는 일본국가 ‘기미가요’보다도 스타디움 서쪽 한곳에서 들려오는 ‘애국가’의 친근한 소리가 더 크게 들렸을지 모른다(1, 2),
1997년 나는 30여 년의 미국 생활을 접고 서울 아산병원에 어렵게 둥지를 틀었다. 조혈모세포 이식과 뇌종양 연구 분야에서 후학을 양성해 달라는 부탁이 있어서다. 부모님이 살아 계시는 조국 땅으로 늘 돌아가고 싶어했던 나의 심정을 잘 알고 있던 아내는 나를 향해 귀소본능의 병이 또 도졌다고 투덜거렸지만 존경하던 마라톤의 대선배들을 직접 만나 뵙고픈 염원이 결국 나를 한국으로 향하게 했다. 나는 미국에 오래 살면서도 손기정, 최윤칠, 서윤복, 함기용 등을 마음에 기렸고 나의 귀국 당시에는 다행히 그분들은 모두 살아 계셨다. 그중 내가 가장 만나고 싶던 손기정 선수는 주로 아드님 손정인씨가 사는 일본에 계셨으므로 그의 자서전 등 그와 관련된 신문자료들만 찾아보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손기정 선수의 유년기와 청년기에는 장시간 힘들게 달리는 마라톤 선수의 행동을 사람들은 미련한 일로만 치부했다. 이런 유교적인 사회적 풍토 속에서 배고픔에 찌든 선수들이 일본에 밀리지 않는 세계적 마라톤 챔피언으로 성장하기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당시 경신학교(儆新學校) 교장으로 있던 선교사 James Gale의 관측이 이런 사회상을 말해준다. 1935년 11월3일 베를린올림픽 선발전에서 손기정 선수가 세계 최고 기록인 2시간 26분 42초로 일본 선수들을 물리치고 우승했고 함께 출전했던 남승룡 선수도 4위의 좋은 성적으로 일본에서 돌아왔을 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양사람들이 정구(Tennis) 하는 걸 보고서는 왜 힘든 일을 하인에게 시키지 않느냐던 조선 땅에서 오늘 이렇게 훌륭한 마라톤 우승자를 키워내다니. 손군의 우승을 보니 조선사람들의 의식도 많이 달라졌음을 느끼게 된다”라고.
그리고 가난했던 당시를 반영하는 손기정 선수의 다음과 같은 일화는 우리 모두의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찬조금이 많이 걷힌 날에는 땀을 흘리는 선수들에게 설탕 다섯 숟갈 탄 물을, 적게 걷힌 날은 설탕 한 숟갈 탄 물을 마시게 했다. 선수들 모두가 극기의 정신으로 마라톤에 몰두했다”. 참, 라면도 없던 시절 그 젊은 선수들이 어떻게 그런 극심한 허기를 극복했을까?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나는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을 대비해 한국에서 애틀랜타로 전지훈련을 온 마라톤 선수들과 몇 주 함께 지냈다. 그땐 한국의 경제 사정이 좋아 손기정 시절처럼 굶주리는 선수는 없었다. 이들 전지훈련 온 선수들과 Buffet 식당에 가서 놀란 일이 있다. 매일 2~3번 강도 높은 훈련을 소화해 내는 깡마른 남녀 선수들이 각자 3인분 이상의 분량을 후딱 해치우던 모습을 본 것이다. 그렇게 식욕이 왕성한 마라톤 선수들이 예전엔 설탕 한두 숟가락으로 그 고된 훈련을 이겨냈다니!
손기정은 올림픽 마라톤 제패 이듬해에 그동안 미루었던 학업을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인촌 김성수의 도움으로 보성전문에 입학한다. 하지만 입학 직후부터 총독부의 감시를 벗어나지 못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명치대(明治大)는 한국인 동문들이 많이 있어 손기정도 이곳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명치대 동문인 양정고보 선배 정상희와 마라톤 선배 권태하의 보증으로 1937년 명치대 법학전문대에 입학한다. 육상은 하지 않아야 한다는 코미디 같은 조건이 붙어 있었다. 육상 전력이 하위권에 속한 명치대 육상부 동료들은 끈질기게 그의 도움을 요청했다지만 그는 일본을 돕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끝까지 명치대 육상부를 외면했다.
손기정 선수는 그의 올림픽 금메달의 후계자가 속히 나오기를 염원하며 후배 양성에 혼혈을 기울였다. 첫 번째 결실은 1947년 보스턴 마라톤의 우승자 서윤복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3년 후 1950년에 보스턴 대회에서 1, 2, 3등을 싹쓸이한 함기용, 손길윤, 최윤칠 선수가 대를 이어 그를 흐뭇하게 했다. 하지만 이들 중에서 올림픽 금메달 수상자는 나오지 않았다. 세계 2차대전의 공백기를 지나 1936년 후 처음 열린 1948년 런던올림픽에선 그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믿었던 최윤칠은 기권했고 우승 후보 서윤복은 27위에 그치고 말았다. 이후 1952년 제15회 헬싱키올림픽에서도 최윤칠은 4위에 그쳤다. 손기정 선수의 마지막 제자인 이창훈 선 (손기정의 사위)도 1956년 멜버른올림픽에서 4위에 머물러 베를린올림픽부터 56년의 기나긴 공백기(암흑기)가 이어갔다.
하지만 1992년 마침내 황영조 선수가 혜성같이 등장해 바르셀로나에서 손기정 선수의 오래된 한을 풀어드린다. 당시 태극마크를 달고 달린 황영조가 우승 직후 관중석에 있던 선배 손기정에게로 달려가 마라톤 금메달을 목에 걸어드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Stefan Muller가 서술한 “인내와 끈기로 성취한 국가와 민족의 환희의 극적인 감동의 순간” 이었다. 여기서 부연할 것은 1992년 황영조의 금메달은 손기정의 직접적인 작품은 아니었다. 6.25의 암흑기를 거친 후 60년대 70년대의 과도기를 지나며 마라톤 부흥의 꿈이 서서히 움트기 시작했고 1980년대 후반이 되면서야 마라톤 중흥의 물결이 일제히 일어났다. 그리고 코오롱, 한국전력, 삼성 등 여러 기업의 지원이 밑거름되었다. 이때 마라톤 중흥을 이끈 인물은 정봉수감독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는 코오롱 마라톤 감독을 맡으며 엄격하고 면밀한 조련 술로 김완기, 이봉주, 황영조 등을 발굴했고 마라톤 한국신기록을 양산해 갔다. 그 결과 영웅 황영조가 탄생한 것이다. 1996년 제26회 올림픽의 주최도시가 애틀랜타로 결정되자 1995년부터 코오롱의 정봉수 감독과 한국전력의 주형걸 감독이 이끄는 엘리트 남녀 선수들이 애틀랜타로 대거 몰려왔다. 그때 처음 만나본 정봉수 감독의 스파르타식 훈련방식은 나를 놀라게 했다. 그는 마라톤 식이요법도 철저히 지켜 경기 1주 전에 시작하는 단백질 섭취 기간에는 육류 요리에 소금 등 어느 조미료도 못쓰게 해 음식을 먹는 선수들은 한결같이 고기를 먹는 것이 구두창을 씹는 것 같다고 불평을 했다. 그리고 400m 경기장을 달리는 고강도 훈련 전후에도 생수 이외의 음료수는 일체 금지시켜 무심코 내가 준비해간 코카콜라 상자 등은 버려지기 일쑤였다. 정 감독을 따라 우리 집 근처에 있는 고등학교 경기장에서, 국립공원 산길에서 그리고 실제 올림픽 마라톤 주로(走路)에서 곳곳을 다니며 선수들을 안내했다. 새벽 5시에 올림픽 마라톤 코스를 달릴 때는 경찰들에 의해 차로에서 인도로 야러 번 쫓기기도 했다. 황영조 선수는 족저근막염으로 고생하기도 했고 훈련캠프를 이탈하는 이변도 일으켰지만, 이봉주 등 출중한 선수들이 많아 나는 한국팀에서 마라톤 우승자가 나오리라는 기대감을 저버리지 않았다. 정봉수는 놀랍게도 운동생리학, 영양학, 식이요법, 운동 심리학 등 제 분야의 최신지식을 통달한 거의 완벽한 마라톤 감독이었다. 안타까웠던 일은 눈코 뜰 새 없는 훈련 일정에도 그는 지병인 신부전증으로 수시로 복부에 자가 투석을 해야만 했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후 직장을 서울로 옮긴 나는 당시 한국 육상계를 이끌고 있던 정봉수, 함기용, 주형걸 등 지도자들과 가끔 만났다. 함기용 선수와는 한강 변에서 열린 10K 대회에 함께 초청받기도 했다. 그리고 새로운 마라톤 리더들인 김재룡, 백승도 등과도 교우하면서 우리는 황영조 이후 한국에서 올림픽 금메달이 나오지 않는 현실에 답답함을 토해내곤 했다. 더군다나 1992년 후론 올림픽 메달권 기록에 든 선수조차 드물고 설상가상으로 마라톤 세계기록은 점점 더 단축되고 있었다. 2021년 도쿄올림픽에서 이영훈 선수가 2시간 12분 58초로 출전 선수 80명 중에서 22위를 했을 뿐이다. 대회 우승자의 기록은 2시간 8분 38초였으니 무려 4분 20초의 차이가 있었다. 이는 거리로 따지면 거의 1 마일의 격차를 말해준다. 여자의 경우 같은 도쿄올림픽에서 한국의 전윤주 선수가 2시간 32분 33초로 24위를 해 우승자 케냐의 페로피스 젭체리의 2시간 27분 20초의 기록보다 5분 13초나 뒤진다. 오늘 한국선수 중에서 마라톤 세계기록 (남자 2시간 1분 39초, 여자 2시간 8분 38초)에 5분 또는 10분 내로 근접한 선수는 없다. 이런 추세라면 한국선수들은 다가오는 올림픽에서 마라톤 출전권도 못 받을 위기에 있다. 만일 출전할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우승권 선수와 1~2 마일은 뒤처질 것이 뻔하다. 고인이 되신 손기정 선배에게 부끄럽기 그지없다.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극기와 투혼의 화신인 손기정 정신을 기리기 위해선 단순 마라톤 경기 이상의 대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손기정 선수의 우승 기념일인 8월9일을 잡아 한국 남단의 부산에서부터 손기정의 고향인 북쪽 신의주까지 달리는 ultra 마라톤 대회를 연례행사로 정하고 싶다. 조국분단으로 당장 어려우면, 땅끝마을 해남에서부터 남북 분계선 임진각까지의 코스(course)를 만들어 국민이 열광하는 대축제를 벌려 세계적인 선수를 발굴할 수 있으면 한다. 손기정의 빛나는 금메달을 이어가는 선수가 이 땅에서 나와야 한다.
참고문헌
(1)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 1983년. 학마을 B&M
(2) 희망의 속삭임 Blog. 2020.6.11.
김태형
'윤치호 선배를 기리며' 저자. 미국 조지아주 거주 시인·교수·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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