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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다 (2)
단편소설 (2023. 시와정신 해외문학상 수상작) - 김외숙
-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editorial@koreatimes.net)
- May 26 2023 09:51 AM
비행기는 어느 듯 미동 없이 날고 있다. 벨트 사인이 사라지자 사람들의 입에서 가벼운 안도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온다. 긴장에서 놓여나는 소리이다.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더러는 잠을 자든가 승무원에게 마실 것도 청하며 한결 안락한 분위기가 되었다. 다리를 제대로 펼 수 없는 좁은 공간에다 몸을 구겨 넣은 채 몇 시간 앉아 있었더니 허리가 뒤틀리고 다리가 저렸다. 나는 화장실도 다녀올 겸 자리에서 일어나 일부러 좀 걸어 비행기 꼬리 즈음에 있는 화장실로 나선다. 화장실 앞 작은 공간에는 몇몇의 사람이 선 채 다리를 일렁이며 가벼운 운동을 하기도 하고 아기를 안은, 중년이 훨씬 넘어 보이는 여인이 가려진 창을 조금 연 채 바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좀 전에 칭얼대던 그 아기일까? 할머니라기에는 좀 젊어 보이는 그 여인의 품에 안겨 눈을 말똥이고 있는 아기의 얼굴에서 좀 전의 칭얼대던 그 아기를 생각할 수는 없었다. 아기의 입에는 플라스틱 젖꼭지가 물려 있었다.
힐끗 내려다본 바깥엔 구름이 평원을 이루고 있고 비행기는 순항하고 있어 나는 지금 하늘을 날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의식하지 못한다. 그냥 편안히 집안에 있는 느낌이랄까? 장거리 비행은 어쩌면 이 기분 때문에 하는지도 모른다. 구름 아래가 여태 북 태평양인지 아니면 북미 대륙인지 가늠을 할 수 없다, 단지 비행시간을 미루어 아직은 멀었다는 짐작만 할 뿐. 나는 차례를 기다려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부터 바라본다. 장거리 여행 때에는 화장도 피하고 옷이며 신발도 되도록 집안에서처럼 평안한 차림으로 하는 것은 여행을 가볍게 하자는 나름의 방법이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푸석한 얼굴은 그래서인지 나이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들어 보인다.
‘나이 들수록 언니 모습이네?’
어머니의 병실에서 어머니만큼이나 오랜만에 만난 이모는 날 두고 그렇게 말했다. 어머니의 유일한 혈육이 어머니를 닮는 일이 당연한 일이겠지만 나는 그 말을 그렇게 기껍게 받지 않았었다. 내 반응에 어머니는 침묵하셨다. 어쩌면 어머니는 당신을 닮았다는 말에 대한 딸의 반응에 서운함을 그렇게 침묵으로 대신하셨는지도 모른다. 이모의 말처럼 내가 나이 들수록 어머니의 얼굴을 한다면 그것은 내가 어머니의 딸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마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미워하면서도 닮는다는. 그렇다 나는 어머니를 참 많이도 미워하고 원망했다. 그 미움은 지금도 침전물처럼 내 가슴 밑바닥에 남아 있다. 내가 어머니를, 그럴 수밖에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할 그때면 그 미움이라는 침전물도 없어질까? 그것은 내 삶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그러나 그리 쉽게는 풀릴 가능성이 없는 숙제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내가 마치 남자를 몰랐던 딸처럼 살아주기를 원했다. 스물이 안 된 나이에, 어머니 모르게 가진 생명은 어머니에게 생명으로서의 의미보다는 딸이 만난 횡액으로 치부되었다. 그 생명을 떼어 보내기만 하면 내가 다시 남자를 몰랐던 그때의 순결로 돌아가는 것으로 어머니는 억지를 부리셨다. 그러나 내게 그 생명은 지우면 없어지는 단순한 흔적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새로운 세계에서 얻은 두려우면서도 벅차던 희열이었다. 아이는 아마도 내가 그 아이를 얻었을 때 즈음의 나이가 되었겠다.
내가 화장실에서 나올 때까지도 아기를 안은 중년의 여인은 물끄러미 구름만 끝없이 펼쳐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이는 구름은 늘 그 위를 한번 걸어보고 싶은 충동질을 느끼게 한다. 마치 징검다리를 건너듯 구름 조각 위를 깡충깡충 건너뛰고 싶은 충동질을. 여인의 품에 안긴 아기는 플라스틱 젖꼭지를 문 채 잠이 든 것 같다. 아기의 엉덩이에는 띠가 둘러져 여인의 어깨와 연결되어 있다. 아마도 며느리나 딸을 대신해 아기를 안아주는 것 같았다.
나는 금방 자리로 돌아가지 않은 채 여인의 품속에서 잠이든, 아직 배냇머리도 깎아보지 않았을 것 같은 아기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낳아본 적은 있어도 키워본 적은 없는 나는 아기의 모습으로 나이를 가늠하기가 실은 힘들다. 첫돌을 지나면 아기는 저렇게 자라는 것일까?
잠든 아기를 받아 품에 안아보고 싶다. 내게도 아기를 안고 젖을 물린 때가 있었던가?
헝겊으로도 불러온 배를 더 이상 가릴 수 없던 지경이 되어서야 어머니가 아시고 내린 결단은 일단은 낳자는 것이었다. 낳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도 달리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비 없이 키운 어린 외딸이 혼전에 만삭이 되었다는 사실에 어머니는 발등을 찧는 한탄과 동시에 날렵한 대책을 먼저 세우셨다. 그리고 다그치셨다.
‘너는 아무 것도 모른다, 상대가 누군지는 더욱 모른다. 끝까지 입 다물고 나 하는 대로만 따라 해라.’라고.
어머니가 세운 대책이 얼마나 완벽한 것인지는 나는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내게 다른 세상을 알게 해 준 남자의 아기를 가졌다는 사실, 그런데 그 사실이 너무 엄청난 내 몸의 변화를 전제로 한다는 사실이 날 두렵게 했을 뿐이다. 나는 하루빨리 내 몸의 변화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그것은 몸의 성장과는 달리 정신은 어쩔 수 없이 어렸던, 내 나이와 상관있던 일이었다. 함구를 당부하는 어머니의 대책과 내 두려움이 맞아떨어지면서 만든 결론이 낳기는 하되 그 아이를 볼 수 없는 일이란 사실은 나중에야 알 수 있었다, 이미 그 아이가 내 품을 떠난 후에.
소설가 김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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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editorial@koreatim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