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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다 (5)
단편소설 (2023. 시와정신 해외문학상 수상작) - 김외숙
- 관리자 (it@koreatimes.net)
- Jun 05 2023 09:54 AM
나는 그 아기의 행방을 모르고 행방은커녕 열 달을 품고 있었어도 그 아기가 남아인지 여아인지조차도 모른다. 제대로 잘 자랐다면 저를 잉태했던 그때의 내 나이만 할 그 아이, 그러나 어디에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그 아기에게 내가 어떻게 어머니를 이해시킬 수 있으며 나는 기회조차도 가질 수 없었던 이별의 의식을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곧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음을 의미했고 그 아기에게 나는 영원한 죄인으로 남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알 리 없는 알리는 조급하기만 하다. 그는 아마도 내가 도착할 그 비행장에 와 기다리고 있으리라. 마치 내가 자신의 아기를 품고 나타나기라도 할 것인 듯.
비행기는 여전히 그 자리에 멈춘 듯 미동 없이 날고 있다. 옆 좌석의 남자 때문에 알리를 생각하다 깜빡 잠이 들었나 보았다. 단잠에 빠져 있다가 또다시 아기 칭얼대는 소리에 깨어났다. 내가 깨어났을 때는 잠잠하던 비행기도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벨트를 매라는 사인과 함께 다급한 승무원의 아나운서멘트가 비행기 안을 갑자기 긴장으로 몰아넣는 것 같다. 키질하듯 마구 들까부는 비행기의 흔들림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양손을 움켜쥔 채 스크린을 바라본다. 스크린 속의 비행기는 이제 알래스카 근처를 날고 있다. 아직 저곳을 날고 있으면 어느 사이에 목적지까지 도착할까 싶은 조급증과 함께 몰아 쥔 손바닥엔 진땀이 밴다. 흔들림에 놀랐던지 아기가 자지러지듯 울기 시작한다.
‘좀 달래지.’
아까부터 비행기가 흔들릴 때마다 경기하듯 울어대는 대형 스크린 쪽의 아기 엄마에게 은근히 짜증을 낸다. 아기의 울음이 불안한 마음을 더 불안하게 하는 것 같다. 옆의 알리를 닮은 남자가 살며시 작은 창 덧문을 올리고 내다본다. 작은 틈 사이로 파고드는 햇빛이 눈을 찌를 듯하다. 머리를 내밀어 바라본 까마득한 눈 아래에는 흰 눈으로 덮인 산들이 날카롭다. 눈을 찌를 것 같은 햇빛도 만년설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일까? 문득 내가 탄 비행기가 이즈음에서 추락한다면 우리는 저 거꾸로 꽂은 고드름 같은 산봉우리 어딘가에 떨어질 것이라는 방정맞은 생각을 한다.
아기는 울음을 멈추지 않고 비행기의 흔들림과 아기 울음소리에 시달리면서도 승객 누구 한 사람도 짜증이나 투덜대는 사람은 없다. 나는 두려움을 잊을 겸 다시 잠을 청했다. 실은 나는 잠이 많이 필요하다. 귀국 후 어머니의 병실에서 지내며 제대로 쉬지 못한 탓인지 내 몸은 어딘가에 기대기만 해도 그대로 잠자리가 될 정도로 피로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의 시차에 적응하자마자 또 내가 사는 곳으로 떠나고 있고 이미 비행기는 날짜변경선을 넘었으니 다시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그런데 몸은 피로에 절어 있는데 쉬이 잠은 이룰 수가 없다.
적응, 무엇이든 낯선 것에 적응하는 일이 나는 쉽지 않다. 열 달 동안의 부른 배에서 쭉정이가 되었을 때 내가 그토록 원했으면서도 가벼운 배에 적응하는 일은 쉽지 않았었다. 마치 박제된 동물처럼 속이 다 비워진 것 같은 허기증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주문을 외듯‘아무 일도 없었다.’ 라고 말씀하셨고 그것은 곧 아무 일 겪지 않은 듯 살다가 아무 일 겪지 않은 사람처럼 알맞은 때에 가정을 이루라는 말씀이었지만 나는 나 자신이 그럴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주 그 아이가 그리웠다. 뱃속에다 담고 있었을 때 주변의 눈길을 피해 숨바꼭질하듯 감추고 숨기면서 더 끈끈하게 정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아이가 내 속에서 벗어난 즉시 너무나 깔끔하게 처리했으므로 단지 내 속에 품고 있었을 동안만 내 아이였을 뿐이었다. 나는 비워진 내 속에다 아이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어머니에 대한 원망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내 몸을 빠져나간 것과 동시에 영원한 이별이 된 그 아기를 다시 찾아내 뱃속에다 채우려는 요량으로 어머니를 떠났다. 그것은 어머니를 거부하는 일이었고 적어도 그 일에 대해서만큼은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내가 알리를 만나는 일은 어머니의 가슴에다 다시 한번 비수를 들이대는 일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알리의 아이라면 더욱. 알리는 특히 어머니가 원하는,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조건의 사람은 결코 아니다. 어머니가 그 아이에게 그렇게 대했듯 나도 그렇게 한다는 어깃장이랄까. 나는 알리의 품에 안길 때마다 알리보다 어머니를 먼저 떠올리곤 했다.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그 아기를 생각하곤 했다.
문득 알리가 그립다. 마치 쓰다듬듯 하던 그의 깊은 눈길이 그립다.
‘빨리 와. 보고 싶어.’
그의 심플한 표현은 연구로 복잡할 그의 머릿속 같지 않아 좋다. 업무 외의 그의 표현은 늘 심플했다, ‘내 아이를 갖고 싶다’라던가, ‘빨리 와.’ 같은 표현 등의. 아마도 그는 공항에 나와 있으리라. 문득 깊은 그의 눈길이 내 은밀한 곳을 스치기라도 한 듯 짜릿한 전율이 인다. 비행기가 만드는 두려움, 이 경황에도 마치 번지점프를 하듯 전율은 일어남이 신기하다. 사람들이 번지점프를 즐기는 이유도 어쩌면 서로 극한으로 상반되는 두 감정이 부딪으며 만드는 쾌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소설가 김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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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it@koreatimes.net)